
미국이 이란과의 전쟁을 계기로 이른바 '페트로 아메리카(Petro-America)'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국의 막강한 원유 생산력을 방패 삼아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선을 그었다. 동맹국에 호르무즈 해협 방위와 에너지 수급 책임을 지우고, 이를 기회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 장악력을 높이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 핵심 메시지는 '미국의 완전한 에너지 자립'이다. 특히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날 필요가 없으니, 아시아와 유럽 등 원유가 급한 나라들이 직접 자국 상선을 지키라고 떠밀었다. 그게 아니라면 미국산 원유와 에너지를 사다 쓰라는 것으로,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자국의 에너지 패권을 공고히 하는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 행보다.
문제는 원유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인 우리 경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비상 수급 관리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달 20일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이 사실상 차단되자, 산업통상부는 4월 한 달간 약 5000만배럴의 대체 물량을 긴급 확보했다. 예년 수입량(약 8000만배럴)에는 못 미치지만, 에너지 절약 등 수요 관리와 함께 2000만배럴 규모의 비축유 스와프 물량을 선제적으로 투입해 틈새를 메우고 있다.
전체 원유 수입량 중 미국산 비중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중동산 원유 수급 차질에 대비하고 미국의 통상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실제 최근 국내 4대 정유사의 중동산 대체 물량 중 가장 큰 비중은 미국산으로 알려졌다. 10년 전인 2016년 원유 수입 물량 기준으로 86%에 달하던 중동산은 지난해 69.6%로 떨어졌다. 반면 미국산은 2016년 0.21%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16.3%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현재 가장 큰 고비를 맞고 있는 나프타 공급과 관련해선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직접 '석유화학제품 수급상황 점검 회의'를 열고 필수 석화제품 공급망 사수에 나섰다. 종량제봉투, 헬륨, 수액제포장재 등 핵심 생필품 및 소재 수급에 당장 이상은 없으나, 시장 불안을 조장하는 매점매석 등 교란 행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으로 엄단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석유화학제품 매점매석 금지 및 수급 조정을 위한 규정' 제정에도 착수했다. 민관 합동 자원안보 위기대응반도 이날 발족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비상 상황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양기욱 산업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미국과 이란이) 당장 종전 선언을 하더라도, 파괴된 원유 생산 시설과 헝클어진 공급망이 원상 복구되기까지는 한 달 이상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며 최고가격제 등 비상 대응 체계를 종전 이후에도 계속 유지한다고 밝혔다.
설상가상으로 호주가 내수용 가스 부족을 이유로 LNG 수출 제한 조치 절차를 개시하는 등 자원 무기화 추세도 짙어지고 있다. 가스공사의 장기 계약에 미치는 영향은 3만~4만톤 수준으로 미미하지만,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기엔 충분하다.
이런 위기는 고스란히 국내 산업계에 고통으로 전이되고 있다. 원가 압박과 투자 불확실성이 극에 달하면서 기업들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재계 관계자는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고 주가는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기업 입장에서는 원가 압력이 굉장히 커지는 등 불확실성이 증가해 투자 계획조차 세우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또 항공료 등 물류비용 급등으로 인해 기업의 글로벌 비즈니스 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고 '노사 갈등'까지 증폭시킬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이 생존을 위해 비용 절감에 집중하면, 노조는 물가 상승을 이유로 임금 상승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심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