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유럽의 한 제조사로부터 탄소 배출 데이터 제출을 요구받은 국내 부품 업체 관계자는 이를 '사실상의 시장 퇴출 예고'라고 표현했다. 가격과 품질로 승부하던 시대는 끝난것이다.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선 '얼마나 적은 탄소를 썼는가'라는 성적표를 먼저 내밀어야 한다. 올해 본격 시행된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기후위기가 더 이상 환경 담론이 아닌, 거대한 '경제 장벽'임을 선포하고 있다. 미국도 청정경쟁법과 탄소우위 입증제도를 통해, 수입품에 탄소 비용 부과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미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 방어 수단이 될 것이다.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에 이 변화는 가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위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답은 명확하다. 단순히 탄소를 줄이는 수준을 넘어, 탄소 효율을 극대화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녹색생산성(Green Productivity)으로의 체질 개선이다.
과거의 성장이 노동과 자본을 투입해 산출량을 늘리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같은 에너지를 쓰고도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하느냐가 기업의 실력을 결정한다. 이제 탄소 경쟁력은 환경 보호라는 선의(善意)의 영역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결정짓는 '생산성 혁명'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첨단 산업의 심장인 인공지능(AI) 분야다. 생성형 AI와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성장은 역설적으로 '전력 괴물'이라는 숙제를 던졌다. 이제 AI 반도체 시장의 승자는 처리 속도만큼이나 '저전력 고효율' 기술에서 갈린다. 엔비디아와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결국 에너지 효율, 즉 탄소 경쟁력 때문이다. 기술 경쟁력이 곧 탄소 경쟁력으로 치환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철강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SSAB가 수소환원제철로 만든 '그린 스틸'에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기꺼이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 탄소 감축이 비용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이를 고부가가치 시장의 열쇠로 활용한 사례다. 포스코를 비롯한 국내 철강업계의 수소환원제철 투자가 단순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활동을 넘어 미래 시장 주도권 싸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녹색생산성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지점을 직시해야 한다.
첫째, 탄소 데이터를 자본화해야 한다. 이제 제품 설계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Scope3)의 탄소 배출량을 관리하지 못하는 기업은 공급망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둘째, 탄소 감축을 공정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이 곧 원가 경쟁력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셋째, 재생에너지와 자원순환 체계를 수출 경쟁력의 필수 인프라로 구축해야 한다. 버려지는 자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며, 탄소중립과 제조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 국가라는 점에서 오히려 녹색생산성 전환의 잠재력이 크다. 반도체·배터리·철강·조선 같은 주력 산업은 에너지 효율 개선과 재생에너지 전환만으로도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실제 글로벌 투자자와 고객사는 이제 가격과 품질뿐 아니라 '재생네너지 100% 사용'(RE100) 이니셔티브 이행 여부와 탄소 감축 수준까지 공급망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다. 결국 탄소 경쟁력은 환경 규제를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자본과 시장을 끌어오는 새로운 산업 경쟁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결국 미래 경쟁력의 척도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은 탄소로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해답이 바로 녹색생산성이다.
김택수 한국생산성본부 환경·에너지컨설팅센터장 tskim@kp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