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 전 필자는 싱가포르에서 큰 기대를 안고 한국에 부임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결제 국가인 한국에서의 일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어디서나 촘촘하게 연결된 스마트 금융 인프라를 기반으로 송금과 전자결제가 단 몇 초 만에 이뤄지는 생활을 기대했다. 지난 5년간 한국의 결제 시장이 간편결제, 핀테크 등 다양한 영역에서 빠르게 진화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결제 인프라를 갖춘 한국이, 왜 글로벌 방문객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답은 필자가 부임 초기 겪은 경험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해 왔듯이, 늘 사용하던 신용카드로 지하철을 타려 했지만, 외국인은 별도의 교통카드를 현금으로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스러웠다. 넓고 분주한 서울 지하철역에서 현금을 인출할 ATM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기까지 했다. 이는 필자만의 경험이 아니다. 한국을 찾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현금을 구해 발권기 앞에 서야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결제 시스템을 갖춘 나라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미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해외발급 카드나 모바일 기기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오픈루프 방식이 일상화된 만큼, 이 간극은 한국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방문객들에게 분명하고도 실질적인 과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온 비자는, 2025년 8월 제주도 시내버스에 국내 대중교통 최초로 개방형 교통 결제 시스템 도입을 위해 적극 협력했다. 해외 관광객들이 자국의 카드를 그대로 꺼내 제주 버스에 탑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 관광객들의 이동 방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제주관광공사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제주 여행 시 주 이용 교통수단으로 버스를 꼽은 외국인 관광객 비중은 49%로, 이는 전년 대비 17% 증가한 수치다.
서울시도 이러한 방향에 공감해 2030년까지 EMV 컨택리스 기반 오픈루프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으며, 2026년 3월부터는 서울 지하철 키오스크에서 해외 신용카드와 글로벌 간편결제로 교통카드를 구매·충전할 수 있게 됐다. 부임 초기 겪었던 불편함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교통 편의 개선을 넘어 한국이 글로벌 결제 표준과 연결되고, 전 세계 여행객들이 찾는 대표 관광지로서 그 위상을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다.


오프라인 결제 환경도 글로벌 표준과의 상호연결성이 개선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식당이나 카페에서 컨택리스 결제를 시도했다가 단말기가 지원되지 않아 카드를 다시 꽂아야 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비자의 자료에 따르면, 카드나 스마트폰을 단말기에 가까이 대기만 해도 결제가 이뤄지는 EMV컨택리스 방식은 이미 2024년 기준 전 세계 오프라인 카드 결제의 74%를 차지할 만큼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에 한국에서 EMV 기반 NFC 단말기를 갖춘 가맹점은 일부 대형 프랜차이즈 중심에 머물러 있어, 외국인 방문객들은 컨택리스 결제나 글로벌 간편결제 서비스 등 자신에게 익숙한 결제 방식을 사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토스, 네이버페이 등 핀테크 업체들이 NFC 단말기 보급을 확대하면서 국내 가맹점의 글로벌 결제 방식 수용성도 점차 높아지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는 외국인 방문객들의 소비 편의를 높이는 것은 물론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더욱 폭넓은 결제 선택지를 제공하며, 국내 가맹점들의 더 빠른 매출 회전을 지원한다.
온라인 결제 환경도 글로벌 표준에 맞춰 변화한다면 새로운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잠재력이 크다. 한국에 부임한 초기,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매하려다가 본인인증 단계에서 포기한 적이 있었다.
한국은행의 2025년 역직구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소비자들은 국내 플랫폼의 회원가입과 인증 단계, 결제 수단 제한 등에서 진입 장벽을 경험한다. K뷰티, K푸드, K패션, K콘텐츠를 향한 글로벌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지금, 글로벌 결제 수단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지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수출 경로가 다양해지고, 별도의 해외 플랫폼 입점 없이도 글로벌 소비자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기에 비자 토큰 서비스(VTS)와 같은 토큰화 기술이 더해지면 해외 결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카드 정보 유출 및 부정 사용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낮출 수 있어, 국내 가맹점의 해외 결제 수단 도입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인공지능(AI)과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물결 앞에서, 글로벌 결제 인프라와의 상호운용성과 신뢰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사용자를 대신해 결제까지 완료하는 '에이전틱 커머스'는 본질적으로 국경을 넘는다. 맥킨지에 따르면 전 세계 에이전틱 커머스 시장은 2030년까지 5조 달러(약 7400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비자는 2025년 말 기준 다수의 한국 기업을 포함한 전 세계 100여 개 파트너사와 협력해 수백 건의 실제 에이전트 주도 결제를 완료했다. KB국민카드, 삼성카드 등 국내 6개 파트너사를 비롯한 글로벌 카드 발급사들과 함께 '에이전틱 레디' 프로그램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대했다. AI 기반 커머스가 확산되는 환경에서 국내 판매자들의 경쟁력은 결제 인프라의 글로벌 연결성이 뒷받침될수록 더욱 높아질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한국이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할 변화다. 개인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국경 간 자금 이동 방식 자체를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연중무휴 수초 내에 완료되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정산은 수출 중소기업과 역직구 플랫폼이 해외 대금을 수취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비자는 40여 개국에서 130개 이상의 스테이블코인 연계 카드 발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2025년 12월 USDC 기반 정산 서비스를 미국에서 공식 출시했으며, 이를 통해 연간 35억달러 규모의 정산 실적을 기록하는 등 관련 거래 규모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자리 잡는 흐름에 발맞춰, 관련 규제와 인프라가 명확해지면 한국의 수출 중심 경제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커머스의 효율성 향상에 힘입어 큰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5년은 한국 결제 시장의 놀라운 저력을 직접 목격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글로벌 연결성을 갖춰 그 잠재력을 펼칠 때가 왔다.
앞으로의 5년은 한국이 이미 쌓아온 결제 인프라의 내실을 글로벌 표준과 연결해, 세계가 신뢰하는 결제 허브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MV 글로벌 표준 확산, 해외 카드 수용성 확대, 에이전틱 커머스를 위한 신뢰 인프라 구축, 스테이블코인 기반 정산 체계 마련이 함께 이뤄질 때, 외국인 소비 확대, 역직구 성장, 중소기업의 글로벌 진출 확대라는 실질적인 경제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결제 인프라의 핵심 가치가 '로컬' 중심에서 나아가 '연결성'과 '신뢰', 그리고 '보안'으로 확장되기를 바라며, 5년 후에는 한국이 전 세계 소비자와 기업이 신뢰하는 글로벌 결제 허브로 도약하기를 기대한다.
패트릭 스토리 비자 코리아 사장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제학 학사, 금융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비자(Visa)에 입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법인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해왔다. 비자의 비즈니스 기획 및 운영과 컨설팅 및 애널리틱스를 차례로 총괄했으며, 소비자 금융, 결제, 정보 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 비자 코리아 사장으로 취임 후 카드사, 핀테크기업, 유통업계들과 협업하며 한국에 혁신적인 결제 및 데이터 솔루션을 도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