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는 제조 역량을 분산한다는 점에서 타당하지만, 시장이 '칩렛(Chiplet)' 기술과 목적형 특화 설계(ASIC) 시대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를 기획할 '팹리스 육성 방안'이 덜 부각된 것은 구조적인 딜레마입니다.”
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 회장은 독자적인 반도체 설계 기술 없이는 어떤 거대 인프라를 구축하더라도 결국 해외 선도 기업들에 종속되거나, 수동적인 생산 기지로 역할이 제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판교의 설계(본사)와 호남의 인프라(실증·패키징)을 실시간으로 잇는 '원격 이원화 연계형 컨트롤 타워' 전략을 제안했다. 호남 반도체 벨트의 성공 조건은, '호남 제조 인프라' 구축에 매몰되지 않고 수도권의 팹리스가 기획하고 설계한 칩을 호남에서 어떻게 실증하고 완성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역설했다.
대한민국 핵심 팹리스 기업과 고급 설계 인력, 설계자동화툴(EDA) 등 인프라는 이미 경기도 판교와 수도권 거점에 배치가 완료돼 있다. 이 상황에서 지방에 또 다른 설계 공간을 짓는 단순 클러스터 방식은 수도권의 거대한 흡수력을 이겨내기 어렵다.
김 회장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역설했다. 예를 들어, 판교의 팹리스가 설계한 칩을 호남의 수요기업이 선행 적용할 경우 양측 모두에게 파격적인 연구개발(R&D) 자금을 지원하거나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이다. 인력 역시 AI와 실증에 특화된 '광역 오픈 캠퍼스' 개념을 도입, 이론 및 설계 교육을 수도권과 연계하면서 최종 패키징 업무는 호남 거점에서 수행하는 역할 분담형 인력 양성책을 제안했다.
메모리 강국인 한국은 글로벌 팹리스 시장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 엔비디아와 AMD, 퀄컴을 보유한 미국이 70~80%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한국은 0.8%~1% 수준이다. 글로벌 50대 팹리스에 이름을 올린 한국 기업은 LX세미콘이 유일하다.
올해 2월 취임 이후 임기 100여일을 갓 지난 김경호 회장의 최종 목표도 '매출 1조원 이상의 국내 팹리스 기업'을 5개 이상 육성하는 것이다. 통상 1조원 이상 매출을 내는 팹리스는 또 다른 대형 고객을 유치할 충분한 역량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대담=안호천 전자신문 소재부품부 부장

-메모리 중심 반도체 강국에서 시스템 반도체(팹리스)로의 전환이 왜 중요한 시점이라고 보는가.
▲전 산업이 AI로 전환(AX)되는 시대에는,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자율주행이나 로봇 등 맞춤형 하드웨어 최적화 역량이 곧 국가의 미래 경쟁력이다. 특히 첨단 무기체계의 두뇌 역할을 하는 국방 반도체의 심각한 해외 의존도(98.9%)를 끊어내는 것은 안보와 직결된 최우선 과제다. 글로벌 시장은 거대하게 팽창하고 있지만 우리의 입지는 매우 좁다. 팹리스를 국가의 두 번째 성장축으로 세워야만 진정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정부가 발표한 '팹리스 산업 규모 10배 확장' 목표에 대해 협회장으로서 가장 기대되는 부분과 현실적인 도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0배 성장이라는 비전은 매우 고무적이지만, 현장에서는 훌륭한 시제품을 만들고도 본격적인 제조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거대한 자금의 벽에 부딪힌다. 특히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설계 도면을 실제 칩으로 구현하는 테이프아웃(Tape-out)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뛴다.
현재 국가 지원금이 일부 유니콘 기업 중심으로 집중돼 있는데 초기 양산 자금이 절실한 팹리스 기업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 초기 양산 자금의 병목 현상을 국가 차원에서 풀어주지 못한다면, 팹리스 산업의 양적 팽창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최근 K-반도체 전략, 상생 파운드리 구축(4.5조원 규모 40나노급), 국가첨단산업 육성전략 등 주요 육성 정책 중, 팹리스 기업들에 실질적으로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는 정책은.
▲다품종 소량 생산(MPW) 지원과 상생 파운드리 정책은 초기 창업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춘 훌륭한 마중물이었다. 이제는 정책의 초점을 '실매출과 스케일업(Scale-up)'으로 넓혀야 한다. 미국과 유럽이 설계와 R&D뿐만 아니라 양산과 검증을 포괄적으로 지원하듯, 우리도 정부와 민간이 사업화의 위험을 함께 짊어지는 파이프라인을 안착시켜야 생태계가 한 단계 진화할 수 있다.
-중소 팹리스 기업에 대한 전주기 지원(창업 → 시제품 제작 → 양산 → 마케팅) 체계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가?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정책의 강점과 미흡한 점은 무엇인가.
▲개발 지원은 궤도에 올랐지만, 시장 진입 사다리는 끊어져 있다. 우수한 국산 칩을 완성해도 이를 가장 먼저 믿고 써줄 첫 번째 고객(First Customer)을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 상용화 실적이 없으면 해외 수출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 주도의 대형 공공 프로젝트에 국산 반도체를 우선 적용하는 수요 창출형 제도로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
EU는 '반도체법(Chips Act) 2.0'을 통해 수요 측면의 조치(Demand-side measures)를 강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용인 스마트시티, 수원 R&D 사이언스 파크 등 국내 거점 인프라에 국산 칩을 우선 탑재하는 '공공 실증 레퍼런스'를 국가 차원에서 법제화하여 팹리스가 글로벌 빅테크 공급망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MPW 시제품 제작 지원, EDA 툴·IP 라이브러리 접근성 강화, 파운드리 전용 물량 할당 등 인프라 지원이 팹리스 성장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나? 추가로 필요한 지원책이 있다면.
▲세계 반도체 패권의 축은 이미 제조에서 '설계 역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가 물리적 AI 환경을 주도하려면, 핵심 기반이 되는 아날로그·통신 설계자산을 선제적으로 내재화해 외부 의존도를 낮추고 설계 주권을 거머쥐어야 한다.
'팹(Fab)보다 디자인 역량(Design Capability)가 더 중요한 경쟁력'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실제 물리 환경에서 작동하는 '피지컬 AI' 패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아날로그·통신 IP 생태계를 우선 구축하고,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수요 확대를 견인할 메모리 등 인프라 IP 경쟁력을 확보하여 독자적인 K-IP 뱅크를 자립화해야 완전한 설계 주권을 쥘 수 있다.
-팹리스-파운드리-수요기업 간 상생 협력 모델(예: 구매조건부 R&D, 온디바이스 AI 공동 개발)에 대한 평가와,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협력 방안은 무엇일까.
▲'구매조건부 R&D'나 '온디바이스 AI 공동 개발'은 팹리스 기업의 오랜 숙원인 판로와 자금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이상적인 협력 모델로 꼽힌다. 하지만 현실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대형 수요기업들은 리스크를 줄이고자 이미 검증된 해외 빅테크 칩을 찾고, 파운드리는 수익성 높은 해외 대형 고객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팹리스-파운드리-수요기업 간의 진정한 상생 생태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의 '투트랙(2-Track) 지원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우선, 수요기업이 국산 칩을 채택할 경우 파격적인 세제 혜택 및 공공 입찰 가산점을 제공해야 한다. 이는 국산 칩 선행 도입에 따른 불확실성 리스크를 확실한 경제적 인센티브로 덮어주어 자발적인 초기 시장을 창출한다.
또한 파운드리가 국내 팹리스의 다품종 소량 생산을 지원함에 따라 발생하는 손실 간극을 정책 기금으로 보전해야 한다. 이를 통해 파운드리가 수익성 악화 우려 없이 중소 팹리스를 위한 생산 능력(CAPA)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팹리스 설계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협회가 함께 추진 중이거나 제안하고 싶은 인력 양성 정책(대학원, 실무 교육 등)이 있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반도체 인력 양성 정책은 '몇 명을 배출했는가'라는 양적 목표 달성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다. 팹리스 현장에서는 당장 설계 도면을 실제 칩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실무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이론 위주에 머물러 있다. 이로 인해 졸업생들이 기업에 채용되더라도 현장에 투입되기까지 막대한 재교육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미스매칭(Mismatching)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과 대만의 경우, 대학과 팹리스 기업, 그리고 파운드리가 삼각 편대를 이루어 학부 및 대학원 과정에서부터 학생들이 직접 칩을 설계하고 테이프아웃(Tape-out) 해보는 MPW 실무 프로젝트를 정규 커리큘럼화한다. 이는 철저하게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과 차세대 기술 트렌드에 맞춘 현장 밀착형 교육이다.
대만 '중소기업발전조례' 제36-2조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 대만은 중소기업이 일정 임금 이하의 청년 등 인력을 채용하거나 급여를 인상할 경우, 해당 추가 인건비의 200%(특정 조건 충족 시) 또는 상당 수준의 조세 공제를 제공하여 인재 생태계를 보호한다. 우리도 150% 이상의 파격적인 세액 공제와 중소중견 팹리스의 스톡옵션 제도를 개선하여, 팹리스 인력이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완결형 리텐션(Retention)'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팹리스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와 해외 진출(수출, 글로벌 파운드리 활용)에 있어 정부 지원(금융·마케팅·기술보호)의 효과성과 개선 방향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반도체 설계 산업은 제품 검증부터 실제 첫 매출이 나오기 전까지 막대한 자금이 일시에 마르는 특수한 주기를 겪는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맞춤형 금융이 제때 수혈돼야 하며, 국내에서 쌓은 융복합 실증 실적과 글로벌 파운드리 활용까지 적극 지원해야 한다.
-정부가 발표한 'AI 시대, 반도체 산업 전략'의 핵심은 국내 팹리스 산업 규모를 10배 이상 확대해 '반도체 세계 2강'을 달성하는 것이다. 향후 5~10년 내 한국 팹리스 산업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완수해야 할 전략적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현재 국내 다수의 기존 범용 팹리스 업체들도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생존을 위한 AI 전환(AX)에 사활을 걸고 사업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부 팹리스 지원 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기존 기업의 AX 전환 및 고도화 트랙'에 집중 배정하는 전략적 결단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미국, 대만, 중국 등 선도국 및 추격국과의 기술 격차를 단숨에 좁혀야 한다.
향후 비전은 단순한 기업 수 증가나 단기적인 양적 매출 확대에 매몰되지 않고,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근본적인 '질적 도약'을 이룩하는 데 있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10년 내에 글로벌 빅테크들과 당당히 직접 경쟁할 수 있는 10억~100억 달러 규모의 대표 팹리스 기업을 배출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최종 목표다.

○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 회장은
김경호 회장은 삼성전자(1983년~2012년 재직) 상무이사 출신으로, 2013년부터 2019년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코아시아세미'로 자리를 옮겨 2021년까지 대표이사직을 맡았고 이후 어보브반도체에서 2025년까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올해 2월 한국팹리스산업협회 회장으로 선출돼 국내 팹리스 산업계를 이끌고 있다.
이형두 기자 dud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