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디지털 시대의 입법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돌이켜보면 지난 6~7년 동안 유럽연합(EU)의 디지털시장법(DMA)을 벤치마킹하려는 국내 입법 시도가 많았다. 그러나 EU는 역내 경쟁력 있는 플랫폼 사업자가 없어 미국 빅테크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맥락이 강하다. 반면 한국은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빅테크와 경쟁 가능한 국내 플랫폼 기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국가다. 필자는 이와 같은 EU와 한국의 산업 환경 차이 때문에 해외 규제의 무비판적 이식은 '디지털 주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내 플랫폼 성장을 억제하는 '역차별'이 될 수 있어서 반대 의견을 늘 내온 바 있다.

플랫폼은 네트워크 효과와 규모의 경제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특성이 있다. 이를 전통 산업의 독과점 잣대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규제의 대상은 '시장 지배력(Size)' 자체가 아니라 그 지배력을 남용하는 '불공정 행위(Conduct)'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과도한 사전 규제는 플랫폼의 혁신 동기를 꺾고 소비자에게 돌아갈 투자나 서비스 개선 등 편익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심사숙고 그 규제의 방향과 강도를 정해야 한다.

현재 미국, 대만, 영국, 호주 등 주요국은 EU의 DMA와 같은 경직된 '경성법(Hard Law)' 중심에서 개별 산업 특성을 고려한 '행동강령(Code of Conduct)' 등 유연한 접근으로 선회하고 있다. 해당 산업에 대한 충분한 실태조사와 이해관계자 및 산학연 전문가들의 다양한 논의와 협의 없이 추진되는 일방적 규제는 우리 산업의 발전은 물론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현행 공정거래법, 약관규제법 등으로도 충분히 규율이 가능한 행위를 별도 특별법으로 제정하려는 등 입법 행위는 비일관적인 규제 양산, 규제의 분산·중복과 같은 '규제 파편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플랫폼 입법 과정에서 가장 소외되었던 '소비자 후생'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입법은 기업의 발목을 잡는 '성장 멈춤법'이 아니라 창의적 혁신이 가능한 '생태계의 설계도'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기관이 규제에만 방점을 둘 것이 아니라 관계 부처 및 이해관계자 등과의 원활한 소통과 협의를 통해 산업정책적 고려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사전 규제 지양, 규제실증주의와 연성 규제 도입 그리고 소비자 후생을 포함한 산업정책 고려 등 한국 상황에 적합한 규제방법 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적 부분 외에도 절차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점은 없을까.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에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술은 법이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또 오늘날 디지털 시장은 국내외가 하나로 연결된 글로벌 시장이 기본이다. 지금 시대에는 신기술에 발맞춰 신속하게 입법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를 간과하고 섣불리 만든 규제는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산업과 기술에 대한 국회나 정부의 강력한 규제만이 사회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국회의원의 평가는 의원의 법안 발의 수라는 정량평가가 주된 잣대가 되어 국회 임기 내 2만5000건 발의, 국회의원 1인당 50건 가까운 발의가 지속되고 있으며 디지털 분야의 규제 관련 발의도 연간 300건이 훌쩍 넘는다. 우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법안을 발의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책무기도 하다.

제22대 국회 발의 법안 3개 차원별 진단 결과
제22대 국회 발의 법안 3개 차원별 진단 결과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디지털산업입법평가위원회 입법 평가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디지털산업입법평가위원회 입법 평가

하지만 발의된 법안 내용을 평가한 것에 따르면(한국인터넷기업협회 입법평가위원회 자료) 법적인 문제, 산업 차원의 실효성 그리고 집행부분까지 총 100점 기준에서 25점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물론 훌륭한 법안도 있다. 하지만 입법기관인 국회의 법안이 내용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수범자로서 우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회를 통과한 법은 시행돼야 하며, 해당 법은 국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통과된 법은 여간해서는 '롤백'이 되기 어렵기도 하다. 특히 디지털 분야는 그 내용이 어렵고 입법 당시 기술 발전 상황도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국회에 기술이나 과학자(인터넷·디지털 분야 포함) 출신 의원이 드문 점은 산업 이해도가 높거나 전문적인 입법 내용의 부재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우리 국가 발전에도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대안과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인터넷플랫폼 관련 입법 시도의 내용적 문제점을 볼 때 입법 절차 개선점도 논의해 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량 입법 발의 문제는 신중하지 못한 입법 관행과 절차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과 소비자에 대한 영향 분석 그리고 증거 기반 과학적 입법 절차가 도입된다면 대량 발의로 발생하는 문제가 충분히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념과 명분만 앞세우거나 감정에 치우친 여론무마용 입법은 지양돼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다가올 미래의 디지털 입법은 산업과 국민의 삶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늘 우리나라 정부 부처 간 경쟁으로 이어지는 행정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이 때문에 특정 부처 규제 관할을 넓힐 수 있는 입법 또한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법치주의의 중요한 작동 원리 중 하나가 적법 절차(Due process)다. 절차가 많을수록 권력 행사를 하기 어렵다. 정부나 국회는 아마도 이를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입법은 입법기관으로서 국회의 참된 권위를 세우고 국민의 많은 지지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양질의 입법을 위한 프로세스 도입은 입법권에 대한 제약이 아니라 국민생활 증진 도모로 확대돼 갈 것이다.

디지털 관련 입법에서는 양이나 속도보다 질적으로 향상된 입법이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는 실증과 검증이 동반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입법 검토 절차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한다.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 shpark@kinternet.org

〈필자〉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민대에서 법학 석사, 가톨릭대에서 조직상담학 석사를 취득했다. 네이버에서 대외협력실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컴투스, 게임빌 법무총괄 이사로 지냈다. 2018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위원회 규제심사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지식정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규제 완화, 글로벌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 억제, 인터넷 플랫폼 활성화 도모 등 국내 인터넷산업의 선순환 생태계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