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보다 더 큰 가치…진관사가 지키는 것은 '독립의 기억'

불단 속 90년…태극기가 지켜낸 것은 '나라'가 아니라 '기억'이었다

백초월 스님 재조명·태극기 박물관·무궁화 정원…역사를 현재로 잇는 '기억 프로젝트'

진관사 태극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본엄 스님.
진관사 태극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본엄 스님.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태극기를 숨겼고, 누군가는 90년이 지난 뒤 그것을 세상 밖으로 꺼냈다. 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의 천년고찰 진관사(津寬寺)가 또 한 번 역사의 중심에 서고 있다.

오는 30일 국가유산청의 국보 지정 현지실사를 앞둔 진관사는 단순히 문화재 한 점의 승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을 오늘과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공간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17년 전 불단 속에서 발견된 태극기는 이제 국보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진관사가 바라보는 목표는 국보 지정 그 자체가 아니다. 태극기를 지켜낸 사람들의 희생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더 큰 과제라는 것이 사찰의 생각이다.

불단 속에서 발견된 '시간의 캡슐'

지난 2009년 5월 26일 칠성각 해체·복원 공사 과정에서 불단 뒤 벽체 속에 감춰져 있던 보자기 하나가 발견됐다. 보자기 안에는 오래된 태극기와 함께 독립신문, 신대한 창간호, 자유신종보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관련 문건 19점이 보관돼 있었다.

누군가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이 이 자료를 발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봉인해 놓은 흔적이었다. 진관사 템플스테이 국장인 본엄 스님은 당시를 “먼지를 털어내는 순간 태극 문양이 보였다”며 “절 안에서도 불단 아래에서 태극기가 발견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진관사의 역할은 이 태극기를 세상 밖으로 제대로 꺼내 독립운동의 정신을 함께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보보다 더 큰 가치…진관사가 지키는 것은 '독립의 기억'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꾼 '저항의 상징'

진관사 태극기가 특별한 이유는 제작 방식에 있다. 새 천으로 만든 국기가 아니라 기존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덧그려 만든 태극기다.

일제의 상징을 민족의 상징으로 바꿔버린 이 태극기는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가장 강력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총과 칼이 아닌 붓과 먹으로 완성한 독립선언이자, 독립 의지를 담은 상징물이었다.

문화재적 가치 역시 여기에서 나온다. 단순히 오래된 태극기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과정과 시대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초월 스님…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재조명

진관사가 국보 지정 이후 가장 중요하게 추진하려는 사업 가운데 하나는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에 대한 재평가다.

백초월 스님은 3·1운동 이후 불교계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독립선언서와 항일 문서를 전국 사찰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고, 일제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진관사에서는 이번 국보 승격을 계기로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 업적을 보다 폭넓게 조명하고, 현재 애국장에서 대한민국장으로의 서훈 격상도 추진하고 있다.

사찰 측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상징하는 태극기와 이를 지켜낸 인물을 함께 기억해야만 역사적 의미가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국보보다 더 큰 가치…진관사가 지키는 것은 '독립의 기억'

태극기 박물관과 무궁화 정원…역사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진관사는 국보 지정 이후 또 하나의 과제로 '태극기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진관사 태극기를 비롯해 대한민국 태극기의 역사와 독립운동, 불교계 항일운동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교육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사찰 곳곳에는 독립의 상징인 무궁화를 중심으로 한 '무궁화 정원'도 조성할 예정이다. 관람객이 문화재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자연스럽게 체험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국보를 넘어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국가유산청의 이번 국보 지정 심사는 문화재 한 점의 가치를 평가하는 절차이지만, 진관사는 그 의미를 더 크게 바라보고 있다. 국보 승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다.

태극기 한 점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이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나라를 지키려 했던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진관사의 궁극적인 목표다.

본엄 스님은 “국보가 되는 것은 태극기 한 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독립정신이어야 한다”며 “진관사는 앞으로도 그 정신을 지키고 전하는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90여 년 동안 불단 속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뎌온 태극기. 이제 그 태극기는 국보 승격이라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정신을 미래로 잇는 살아있는 역사로 다시 세상과 만나고 있다.

소성렬 기자 hisabis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