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민의 디지털 창업사] 〈7〉불법복제의 절망을 넘어: 벤처 BM의 원형을 만든 온라인 게임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

1997년 외환위기(IMF) 충격 속에서 민간의 창의성과 모험 자본이 결합해 벤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디지털 콘텐츠, 인터넷 기술을 주도한 핵심 엔진은 바로 PC, 온라인 게임 산업이었다. 게임 산업의 부흥은 1980년대 전자상가와 대학가 동아리에서 싹튼 개발자들의 도전, PC통신과 초고속 인터넷망, 그리고 PC방이라는 독특한 공간적 생태계가 맞물려 나타난 진화론적 적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삼성과 현대 등 대기업들이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제조업 방식의 경직된 경영 때문에 변화가 빠른 콘텐츠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세 철수했다. 결국 시장 주도권은 창의적이고 유연한 중소 벤처기업들에 넘어갔지만, 불법복제라는 큰 장벽이 나타났다. 비싼 돈을 들여 산 PC와 달리, 소프트웨어(SW)는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인식 탓에 불법복제가 만연했던 것이다. 게임이 아무리 인기를 끌어도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고사 위기에 처한 개발사들은, 결국 복제가 불가능한 온라인 게임(MMORPG)으로 눈을 돌렸다. 역설적이게도 불법복제로 생긴 위기가 우리 게임 산업으로 하여금 인터넷 인프라를 활용하며 체질을 개선하도록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온라인 게임의 탄생은 전혀 다른 두 기술이 만난 운명적인 결합이었다. 뛰어난 그래픽과 탄탄한 서사를 만들던 PC 패키지 게임 기술과, PC통신에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 접속해 글로 소통하게 하던 네트워크 기술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이 두 기술이 융합하면서 세계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인 넥슨의 '바람의나라'(1996)와 엔씨소프트의 '리니지'(1998)가 세상에 나왔다. 대학 동아리처럼 밤을 지새우며 서로 기술을 교류하고 가르쳐주던 개발자들의 자발적인 협력,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사용자들의 열렬한 '팬심'이 초기 K게임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더욱 혁신적이었던 것은 글로벌 표준을 선도한 비즈니스 모델(BM)의 진화였다. 초기 온라인 게임들은 PC방 B2B 과금과 월정액 요금제(Subscription)를 정착시켰다. 나아가 넥슨은 1999년 '퀴즈퀴즈'를 시작으로 '카트라이더'를 통해 접속은 전면 무료화하되, 게임 아이템을 판매하는 부분 유료화(Free-to-Play·F2P) 모델을 세계 최초로 구현했다. 이는 디지털 콘텐츠의 가치를 가상 자산의 소유와 자기표현으로 전환시킨 역사적 비즈니스 혁신이었으며, 이후 구독, 인앱결제 등 IT 스타트업 전반의 서비스 BM으로 확장되는 기틀이 되었다.

이러한 게임 수익 모델의 위력은 인터넷 산업 전체의 지형을 바꾼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2000년 네이버가 한게임과 합병한 후, 한게임에서 창출된 막대한 현금 흐름은 검색 포털 네이버의 서버 증설, 지식iN 인프라 구축, 검색 기술 개발을 뒷받침하는 캐시카우 역할을 했다. 게임 산업이 개척한 BM은 이후 웹툰, 음원 스트리밍, 온라인 서비스 등 스타트업 생태계 전체가 수익화를 이루는 표준 방정식으로 확산 적용되었다.

이 분야의 대표적 혁신가로 크래프톤 장병규 창업자를 들 수 있다. 1997년 네오위즈를 공동 창업해 세이클럽으로 성공을 거둔 그는, 이후 '배틀그라운드'로 우리 게임의 글로벌 확장성을 입증했다. 나아가 초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를 설립해 후배 창업가들에게 자본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엔젤 투자자이자 멘토로 나섰으며 몰입형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SW사관학교 정글'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게임 30년의 역사는 척박한 땅에서 자금과 네트워크를 일구어 글로벌 표준을 만들어낸 위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단기 수익에 치중하고 안전한 길만 찾으려 했던 어두운 그늘도 남아있다. 중소 개발사의 고사와 생태계 양극화가 심화된 가운데, 모험 자본마저 흥행이 검증된 IP나 익숙한 BM으로만 쏠리면서 파격적인 기술적·장르적 도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게임 산업이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한번 혁신 성장을 이루어내어, 우리 창업 생태계 전반을 이끌어 나가야 할 때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