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과 금융권, 산업계의 민간자금을 벤처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1조원 규모의 'LP성장펀드'가 출범한다. 정부는 민간 출자자에게 우선손실충당, 풋옵션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대신 모태펀드의 재정 출자 비중을 낮춰 민간 중심의 벤처투자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투자는 13일 서울 마포구 스타트업벤처 캠퍼스(SVC) 서울에서 'LP성장펀드 출범식'을 개최하며 이같이 밝혔다.

LP성장펀드는 연기금과 금융권, 산업계 등 다양한 출자기관이 벤처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관별 맞춤형 구조로 설계한 투자 플랫폼이다. 정부가 자펀드 또는 모펀드 방식의 투트랙 출자사업을 설계하고 우선손실충당, 풋옵션 등 혜택을 제공해 민간자금의 벤처시장 유입을 유도한다.
현재 18개 기관이 출자를 결정했다. 이 가운데 국민체육진흥기금, 공급망안정화기금, 한국수출입은행, KMI한국의학연구소, 극동물류그룹 등 5개 기관은 이번 LP성장펀드를 계기로 처음 벤처투자조합 출자에 나선다.
연기금 참여도 확대된다. 국민체육진흥기금과 산업재해보상보험및예방기금, 공급망안정화기금 등 3개 연기금이 출자를 확정했다. 추가로 복수의 연기금이 최종 출자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이들까지 참여하면 연기금 출자금액은 지난해보다 5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중기부는 전망했다.
민간 출자기관이 3400억원을 출자하면 모태펀드가 1700억원을 연계해 민·관이 약 5100억원을 출자한다. 여기에 벤처캐피털(VC) 등의 추가 출자를 더해 최종적으로 약 1조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김찬 국민체육진흥기금 기금관리실장은 “기금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중장기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대체투자와 벤처투자를 확대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AI 등 산업구조 변화 속에서 벤처투자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며, 정부의 생산적 금융 정책에도 적극 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재정의 비중은 대폭 낮춘다. 통상 모태펀드 출자사업에서는 정부 재정이 전체의 60% 안팎을 담당하지만 LP성장펀드는 재정 비중을 20%로 낮추고 민간자금 비중을 80%까지 높인다. 중기부는 이를 통해 정부 재정의 승수효과를 5배 이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방산과 인공지능(AI), 뷰티, 바이오 등 전략산업에 투자하는 펀드도 조성한다. 한국수출입은행·BNK금융그룹 컨소시엄과 1100억원 규모의 방산 특화 펀드를 만든다. 네이버·효성·GS와 선익시스템, 극동물류그룹, 태화그룹 등 대·중견·중소기업도 참여해 AI, 뷰티, 바이오, 방산 등에 투자하는 오픈이노베이션 펀드를 약 2500억원 규모로 결성할 예정이다.
노해동 부산은행 상무는 “LP성장펀드는 기존 투자 방식과 달리 출자자가 투자 분야와 대상을 직접 선택해 지역 산업 특성에 맞는 투자가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를 넘어 지역 산업과 벤처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전략적 투자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출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LP성장펀드를 계기로 모태펀드의 역할도 기존 재정 중심의 '마중물'에서 민간자금을 벤처시장으로 연결하는 투자 플랫폼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노용석 중기부 제1차관은 “정부는 마중물 공급자 역할에서 더 나아가 축적된 국가자본을 모험자본으로 흐르게 만드는 모태펀드 2.0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며 “LP성장펀드 출범과 포럼에서 제기된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해 모태펀드의 차세대 벤처투자 플랫폼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LP성장펀드의 첫 출자사업은 14일 공고된다. 중기부는 4분기 내 운용사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펀드 조성 절차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날 출범식에 이어 '민간자금 운용 수단으로서 벤처투자의 재발견'을 주제로 3분기 모태펀드 정책포럼도 열렸다. 연기금·공제회와 자산운용사, 대기업 등 민간 출자자가 벤처투자를 장기적인 자산배분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과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참석자들은 민간자금의 벤처시장 유입을 확대하려면 투자뿐 아니라 회수시장까지 함께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수용 미래에셋자산운용 전무는 “벤처펀드는 장기 복리 효과와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자산군”이라면서도 “단기 평가 부담과 회수 기간의 불확실성을 낮추기 위해 세컨더리 펀드와 구주 거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업의 벤처투자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에서 전략적 투자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노규승 현대자동차그룹 상무는 “기업 LP에게 벤처투자는 피지컬 AI와 로보틱스, 온디바이스 AI 등 미래 기술을 확보하는 전략적 자산”이라며 “대기업과의 실질적인 기술검증(PoC)과 사업 협력까지 연계돼야 투자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회수 성과와 운용사(GP)의 역량이 민간자금 확대의 핵심 조건으로 제시됐다. 최홍석 과학기술인공제회 실장은 GP 간 수익률 격차가 큰 만큼 트랙레코드 검증과 손실 통제 역량 등을 면밀하게 따져 운용사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정책금융이 민간 출자를 얼마나 끌어냈는지를 보여주는 '민간자본 유치 배수'를 핵심 성과지표(KPI)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LP와 GP 간 장기 파트너십 구축과 세컨더리 펀드 조성 등 회수시장 다변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