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미디어 법제는 여전히 '통제'가 기본입니다. 1980년대 국가 통제 수단으로 만들어진 방송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미디어는 이미 대중의 삶, 그 자체가 됐는데 낡은 규제에 묶여 있는 사이 K콘텐츠가 자랄 토양까지 말라가고 있습니다.”
유용화 한국IPTV방송협회(KIBA) 회장이 현재의 미디어업계 상황에 대해 내린 진단은 단호했다. 그는 현재의 유료방송 위기를 사업자 개별의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 생태계 전반이 낡은 규제 프레임에 갇힌 구조적 정체로 규정했다. 가입자 포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급성장, 소비의 모바일·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법제는 여전히 40여년 전 통제 중심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IPTV 협회장에 취임한 유 회장은 통합미디어법 제정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업자와 국회, 관련 부처를 잇달아 만나고 정책 제안을 가다듬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위기 상황을 진단한 유 회장은 “그럼에도 낙담과 체념에 머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협회는 연구팀을 꾸려 11월 중순 법제 개선 초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통합미디어법 세미나, 12월 디지털광고 컨퍼런스로 이어지는 로드맵을 준비 중이다.
대담=박지성 전자신문 통신미디어부장
-취임 4개월여를 보냈다. 소감과 현재 국면 진단을 부탁한다.
▲정신없이 바빴다. 미디어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면서 회원사 이해관계를 넘어 생태계 전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더라. 지상파는 광고 수주가 급감하고 있고, 그나마 구조적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곳이 IPTV라고 본다. 그만큼 협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 현 국면은 가입자 포화와 글로벌 OTT의급성장, 소비 패턴의 디지털 전환이 겹치면서 심각한 성장 정체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가입자 수 중심의 양적 성장 모델은 이미 한계다. 지금은 단순한 위기 대응을 넘어 데이터와 AI를 기반으로 본원적 경쟁력을 다시 세워야 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골든타임이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국내 미디어 산업을 규율하는 법제가 전근대적이고 낙후돼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정치권과 관련 부처의 방치, 즉 '해태(懈怠)'다. 1980년 방송법은 국가 통제 수단으로, 1983년 전기통신사업법은 안보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2008년 IPTV법, 2009년 디지털미디어콘텐츠산업진흥법으로 이어졌지만 대체로 규제 중심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2007년 시청각미디어서비스지침(AVMSD)을 만들어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의 수평적 규제 체계를 세웠고, 2018년 개정, 2020년 회원국 법 반영으로 디지털 환경에 맞춰 재정비했다. 우리는 그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사이 넷플릭스와 OTT가 들어왔고, 국내 사업자는 규제에 묶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경쟁력을 잃었다.
-IPTV의 외형은 여전히 크다. 유료방송 점유율 60%에 가입자도 늘었는데 매출은 정체다.
▲가입자 수나 점유율만 보면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익성은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다. 글로벌 OTT는 규제 사각지대에서 요금제와 비즈니스 모델을 자유롭게 다변화하는 반면, IPTV는 공적 책임과 요금·서비스 규제에 묶여 데이터 기반 신사업으로 수익을 다변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 양적 성장이 매출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에 도달한 것이다. 가입자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만들 수 있도록 제도 기반을 정비하는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여러 규제 가운데 가장 먼저 손봐야 할 것을 꼽는다면.
▲이용요금과 약관 관련 규제다. 지금은 작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서비스에 도전해야 하는 시기인데 현행 약관 규제는 신고제의 외형이지만 사실상 수리를 받아야 하는 구조다. 사업자가 부가서비스 하나를 내놓으려 해도 허가부터 받아야 하니 주저하게 되고 투자도 늦어진다. OTT는 자유롭게 여러 서비스를 하는데 국내 방송사업자의 영업활동만 막고 있는 셈이다. 최소한 마케팅과 영업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건 모든 방송사업자들의 공통된 요구다.
-그렇다면 OTT는 경쟁자인가, 파트너인가.
▲양자택일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존을 찾아야 하는 복합적 파트너십 관계다. 이미 IPTV는 셋톱박스에 넷플릭스, 디즈니+, 유튜브를 제공하는 종합 미디어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여러 OTT를 편하게 즐기는 허브가 IPTV인 셈이다. 다만 제휴가 의미를 가지려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규제 형평성만 확보되면 자율적 시장 안에서 경쟁하며 새로운 토종 OTT를 키우거나 동남아 시장에 함께 진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케이블업계에서 프로그램 사용료 갈등이 먼저 불거졌다. IPTV도 대가산정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서로의 몫을 깎는 제로섬 게임에서 비롯된 구조적 한계다. 관점을 '통제'가 아니라 '상생을 통한 재원 확대'로 바꿔야 하는 이유다. 플랫폼과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는 생태계를 함께 지탱하는 공동 운명체다. 어드레서블 TV 광고와 데이터 솔루션 같은 신사업으로 시장 전체의 파이를 함께 키우는 게 근본 해법이다.
홈쇼핑과도 상생으로 가고 있다. TV홈쇼핑이 성장해야 송출수수료 재원도 늘기 때문에, 핫딜 제공이나 데이터 공유 같은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다만 정부가 정책조정을 명분으로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후유증이 크다. 자율조정에 맡기고 정부는 최소한의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IPTV의 다음 성장 동력은 어디서 찾나.
▲거실의 방송 플랫폼을 넘어선 AI·데이터 기반 미디어·광고 플랫폼으로의 전환이다. 핵심은 셋톱박스가 만들어내는 방대한 시청 데이터다. 가구별, 연령별, 세대별 데이터를 활용해 개인 맞춤형 어드레서블 광고를 구현할 수 있다. 실제로 기존 시청률조사업체에서 0%로 잡히던 콘텐츠가 셋톱 데이터로 보면 0.8%가 나온다. 중소PP에는 결코 작지 않은 수치다. 1800만 셋톱을 잘 활용하면 IPTV 3사만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광고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클 것이다.
최근 정부 광고가 유튜브로 흘러가는데, 국내 개인 맞춤형 디지털 광고 시장을 활성화해야 정부 광고도 효력을 발휘하고, 데이터 주권도 지킬 수 있다. 3사가 공동으로 재원을 모아 어드레서블 광고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고, 협회 정책위도 직접 관여하고 있다.
-K콘텐츠 생태계에서 유료방송의 역할은.
▲안정적인 민간 재원 공급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IPTV는 그동안 시청자와 콘텐츠를 잇는 안방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재원 공급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대형 제작사 편중을 넘어 역량 있는 중소 PP와 독립 제작 생태계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KT는 독립영화관을 주문형비디오(VOD) 서비스에 넣었고, SK브로드밴드는 환경·여성영화제를 후원하며 영화제 기간 VOD로 상영한다. 이런 분들이 우리의 미래 자산이다. 정부가 제시한 150일 홀드백은 진흥책을 함께 마련하는 조건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문체부 주도 거버넌스에 전달했다. 광고 파이가 커지면 과거 'TV문학관' 같은 프로그램에 재투자할 여력도 생긴다.
-국회와 정부에서 시청각미디어서비스법(통합미디어법) 제정을 논의 중이다. 반드시 관철하고 싶은 지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 원칙의 확립이다. 전달 매체가 바뀔 뿐 콘텐츠를 제공하는 본질이 같다면, 영향력에 상응하는 공평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져야 한다. 둘째는 최소규제 원칙의 확립이다. 기존 미디어에 새 규제를 덧씌우는 방식이 아니라, 불합리한 낡은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 국내 사업자가 자율적으로 혁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결국 공공 영역과 산업 영역을 명확히 분리한 합리적·공정한 통합 법제로 완성돼야 한다.
협회는 11월 중순 연구 초안을 내고, 9월 30일 방송학회 및 3개 플랫폼 협회 공동 세미나, 11월 하순 통합미디어법 세미나, 12월 16일 'IPTV의 날' 디지털광고 콘퍼런스로 이어가며 법안 내용을 다듬어 국회와 정부를 설득할 계획이다. 통합미디어법이 여러 차례 추진돼왔고, 번번이 좌절되기도 했다. 안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새로 구성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의지가 상당하다고 느낀다. 기대를 갖고 추진하겠다.
-3~5년 뒤 산업의 모습, 그리고 임기 내 목표는.
▲십수 년 동안 왜곡돼 온 통합미디어법을 제대로 관철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사업의 성공은 사회적 승인과 공공성 확보에 달려 있다. 이윤 추구 기계가 아니라 국민적 공익을 위해 일할 때 사적 이해도 보장된다고 믿는다. 이미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3사가 각 사별로 AI 전환과 개인화 서비스 고도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방송'이 '미디어'로 재정의된 시장에서 IPTV의 진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장기적으로는 한·중·일 민간 교류를 협회 차원에서 만들어 콘텐츠 수출로 잇는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이용자의 신뢰를 받는 건강한 미디어 생태계, 미디어 주권을 지키는 대표 플랫폼으로 IPTV가 자리 잡길 기대한다.

○유용화 한국IPTV방송협회장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과 조지타운대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동국대 정치학부 객원교수와 국회 정책연구위원을 지냈다. 2017년부터 한국외국어대 미네르바교양대학 초빙교수로 재직해왔다. KTV '대한뉴스', 국회방송 '정치토론 왈가왈부', TBS '유용화의 시시각각', BBS불교방송 '유용화의 아침 저널' 등 다수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 2026년 4월 한국IPTV방송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최다현 기자 da2109@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