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은 자원도 자본도 없이 오직 사람과 그들의 열정으로 개발한 기술로 경제 강국을 일궈냈다.
그 밑바탕에는 오랜 기간 원천기술 개발을 위해 '긴 호흡'의 연구개발(R&D) 활동이 있었고, 그 호흡을 기꺼이 감당해 온 주체가 바로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지난 5월, 필자는 오랜 세월 몸담은 대학을 떠나 한국화학연구원장으로 부임했다. 출연연 안에서 마주한 모습은 학교에서 상상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단기간에 성과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긴 시간을 견디며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을 위해 쏟은 연구자들의 뚝심과 사명감이 그곳에 있었다.
대학이 지식의 최전선을 넓힌다면, 출연연은 그 지식을 국가·산업의 힘으로 벼려낸다. 1976년 문을 열고 반세기를 지나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화학연의 역사는 이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는 고부가 정밀화학제품인 폴리부텐을 한 톨도 만들지 못해 해마다 800만달러를 해외에 내주었다. 화학연은 1984년 국산화에 착수해 상용화까지 10년을 매달렸고, 그 기술을 이어받은 국내 기업은 오늘날 세계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기술은 2025년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선정되기도 했다.
신물질인 비선택성 제초제 '테라도'는 더 긴 이야기다. 2000년대 초 시작한 연구가 20년 만에 미국 환경보호청(EPA) 등록으로 결실을 맺어, 11개국에서 누적 매출 4000억원을 넘어섰다. 또 1995년 착수한 에이즈 치료제 후보물질 연구는 화학연 최초의 상용화 신약인 에이즈(HIV) 치료제로 이어졌고 2021년부터 중국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분야에서는 2013년 이후 단위소자 광전변환효율 세계 기록을 아홉 차례 경신하며 대면적화를 통한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용화 시점이 불확실한 장기 원천기술은 민간이 나서기 어렵다. 화학연은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 기술을 완성하고 시장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글로벌 화학산업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산업과 경제, 국가 경쟁력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류 사회가 혁명적인 변혁을 거치면서 불확실성의 어두움이 드리울 때마다 과학기술은 그 어두움을 밝게 비추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발전을 선도했다.
최근 정부가 미래성장동력 7대 SEED 추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첨단기술이 여는 미래'라는 비전을 천명한 것도 과학기술의 이러한 역할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다만 그 씨앗들은 신뢰 속에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싹트는 '긴 호흡'이 필요하며, 단기 성과에 흔들리지 않는 끈기 위에서만 열매를 맺는다.
다행히 우리 과학기술 정책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출연연 연구자를 옥죄어 온 인건비 수주 위주의 '생계형 R&D'에서 임무 중심, 국가·사회 문제 해결형 미래 연구에 몰입하게 된 것은 반갑고 환영할 만한 변화다.
미래 대전환을 이끌어 가는 힘은 하나의 주체로부터 생성될 수 없으며 모두가 함께하는 역동적인 생태계를 완성하는 데에서 나올 수 있다. 이를 위해 출연연은 대학의 원천 기술과 기업의 상용화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한다.
화학연은 '세상이 답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화학으로 답한다(Chemistry, Find Ways Beyond Now)'라는 새 비전 아래, 국가 첨단 전략기술의 핵심 거점이자 지능형 혁신 생태계의 설계자로 거듭날 것을 다짐해 본다. 지난 반세기가 그러했듯, 화학연은 다음 반세기에도 세상이 풀지 못한 난제에 '화학으로' 응답할 것이다.
신석민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sshin@kric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