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세기 징기스칸의 기병대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며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세웠다. 많은 이들이 그 비결로 뛰어난 기마술을 꼽지만, 결정적 혁신은 '군수 조달의 발상 전환'이었다. 당시 대군은 무거운 수레에 식량을 싣고 다녀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기동력이 떨어졌다. 반면 몽골군은 수레를 버리고 건조 육포(보르츠)와 말젖 가루를 보낭에 담아 말 위에서 보급을 해결했다. 혁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복한 땅 곳곳에 역참을 두어 흩어져 있던 자원을 하나의 망으로 엮고 쉼 없이 돌게 했으며, 이 네트워크는 제국의 혈관이 되었다. 조달의 유연성과 보유 자원의 활용 극대화, 이 두 날개가 유라시아를 제패한 힘이었다.
800년이 지난 오늘날 글로벌 기술·안보 전장에서도 조달 방식의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수백억원짜리 전차가 소형 드론과 상용 인공지능(AI)에 무력화되며 현대전의 공식이 바뀌었다. 미국 국방부 혁신단(DIU)은 까다로운 연방계약법 대신 '기타거래권한(OTA)'을 활용해, 복잡한 심사와 입찰 절차를 줄여 민간 신기술을 수개월 만에 배치하고 시제품 성능이 입증되면 재입찰 없이 곧바로 대량 구매로 연결했다. 유연한 계약 제도가 자국 기업의 혁신을 살리고 국가 안보를 지키는 무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연간 238조원의 공공조달 시장은 첨단기술 기업의 성장을 견인할 마중물이 되어야 하며, 30~40년 전 만들어진 규격과 경쟁입찰 원칙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특히, '개발(R&D)'의 성과가 '구매(계약)'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현장의 요구도 크다.
현재는 우수한 성과를 내고도 다시 규격서를 만들고 경쟁입찰을 거쳐야 해 상용화의 골든타임을 놓치기 일쑤다. AI·우주항공·로봇 같은 국가전략기술은 초기 리스크가 큰데도 사전 구매 약정이 없어 과감히 도전하기 어렵고, 경직된 계약 탓에 '성실한 실패'조차 용납되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 8월 28일 '혁신기술 촉진을 위한 국가계약 체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공공이 혁신기술의 '선제적 구매자(First Buyer)'로 나서도록 국가계약법에 3대 혁신 계약트랙을 도입한다.
첫째, '개발·구매 연계형 트랙'이다. R&D 공모에서 경쟁을 거쳤다면 구매 단계에서도 경쟁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의제해, 우수 성과물은 재입찰 없이 약정된 조건으로 선제 구매한다. 둘째, '성과목표형 계약트랙'이다. 세부 규격을 미리 정하기 어려운 고난도 사업은 발주기관이 성과목표만 제시하고 민간과의 대화로 해법을 찾는다. 목표 달성 여부에 따라 대금을 지급하되, 최선을 다하고도 이르지 못하면 매몰비용을 인정하고 행정제재를 면제하는 성실실패 면책도 도입한다. 셋째, '조달 샌드박스(시범특례)'를 확장한다. 낙찰자 결정 방식에만 한정됐던 특례를 계약이행 관리와 계약내용 변경까지 넓혀 혁신기술의 시장 진입을 뒷받침한다.
계약의 패러다임 전환이 민간의 창의를 공공으로 끌어들이는 '외부의 엔진'이라면, 정부가 이미 보유한 자원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은 국가 경제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내부의 동력'이다. 잠재성장률 둔화라는 구조적 도전 앞에서, 우리는 계약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던 국가의 자산을 일깨워 역동적 경제의 마중물로 삼아야 한다.
흔히 국가 재정을 진단할 때 시선은 주로 국가채무 비율에 집중되지만, 오랜 재정 운용의 결과물인 정부 '자산'의 역할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혜로운 가계가 부채 관리뿐만 아니라 축적된 자산을 알뜰히 운용해 꾸준한 소득을 만들어내듯, 정부의 국가자산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행정 목적의 보유물을 넘어, 매년 새로운 자본소득을 창출하고 대내외 충격을 흡수하는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주요 선진국들 역시 지속해서 늘어나는 정부 부채에 대응하기 위해 보유 자산 관리의 고도화와 혁신을 필수 과제로 삼아 왔다.
영국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반정부의 GDP 대비 부채 비중이 50% 수준을 넘어서며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자산 관리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2018년에는 중앙정부 소유 부동산을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통합 관리하는 정부재산청(GPA)을 신설 했다. 흩어진 국유건물을 재배치해 최근 한 해에만 2,540만 파운드의 운영비를 절감했고, 각 부처가 보유한 지식재산을 상업화하도록 범정부 지침도 마련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GDP 대비 부채 비중은 과거 영국이 자산관리 혁신을 본격화했던 시기의 수준에 점차 근접해 가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관성적인 재산 관리에 머무를 수 없으며, 국부 창출 극대화를 위한 과감한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우리나라 국유재산은 2001년 188조 원에서 지난해 말 1402조원으로 25년 만에 일곱 배 넘게 불어났다.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다. 토지와 건물 중심이던 포트폴리오에 증권과 출자지분, 특허와 저작권이 더해졌다.
그러나 이 자산을 규율하는 국유재산법은 1950년에 제정됐다. 부동산의 물리적 점유와 보존을 전제로 설계된 75년 전의 틀 위에 반 세기가 넘도록 새로운 자산을 하나씩 얹어온 셈이다. 가상자산이라는 새로운 자산군은 아직 그 틀 안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국가자산 관리체계 대전환(K-Asset 혁신 프로젝트)'은 이 낡은 틀을 바꾸는 작업이다.
첫째, 국유재산법을 국가자산기본법으로 전면 개편해 부동산·지식재산·증권·가상자산 등 자산군별 특성에 맞는 규율 체계를 세운다. 소유와 보존 중심의 법적 개념을 운용과 가치창출 중심의 경제적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둘째, 국가자산관리위원회를 신설하고, 자산 운용성과를 정기적으로 평가해 운영방향에 환류하는 체계를 갖춘다. 중앙 관서마다 국가자산책임관을 두어 소관 자산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전문 집행기관의 역량을 키워 실무를 뒷받침한다.
셋째, 중앙정부·지방정부·공공기관의 자산정보를 연내 디지털예산회계 시스템(dBrain)에 연계하여 데이터화하고, AI 기반의 국가자산 전용 데이터베이스(가칭 K-Asset Cloud)도 구축한다. 잠자는 자산을 찾아내고 가장 알맞은 쓰임새를 연결하는 일을 사람의 감이 아니라 데이터가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낡은 규격의 족쇄를 풀어 성과와 속도를 담아내는 '계약 혁신'과, 잠자는 공공 자원을 깨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자산 혁신'은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꿀 두 날개다. 정부는 9월 국가계약법 개정안 발의를 시작으로 제도개선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K-Asset 프로젝트를 통해 1400조원 국가자산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공공이 먼저 길을 터주고 든든한 자산 기반이 충격을 흡수할 때, 우리 경제는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허장 재정경제부 2차관
〈필자〉 경남 김해 출신으로 영등포고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35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서울대에서 경제학 석사, 프랑스 파리정치대(시앙스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획재정부 개발협력과장과 대외경제총괄과장, 개발금융국장, 국제경제관리관 등을 거치며 대외경제·국제금융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 보좌관과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표부 경제공사로 근무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한국수출입은행 ESG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2026년 2월 재정경제부 제2차관에 임명됐다.

손지혜 기자 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