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우회하는 보이스피싱, 대응 고삐를 늦출 수 없다

이상중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이상중
이상중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이상중

문자 한 통으로 택배 배송 상황을 확인하고, 공공기관의 행정 안내를 받으며, 금융거래 내역까지 알림받는 일은 이미 일상이 됐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익숙한 전화번호 또는 은행, 카드사 이름으로 도착한 문자는 어떠한 의심 없이 확인한다. 이러한 편의에 대한 익숙함과 신뢰가 깊어질수록, 그 틈을 파고드는 보이스피싱 범죄의 수법도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한 사칭이나 금전 요구를 넘어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누고 치밀한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적 범죄로 진화하고 있다.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도록 검찰 또는 경찰을 사칭해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라고 압박하는가 하면, 가족의 목소리를 복제해 급전을 요구하고, 법원 등기나 택배를 가장한 문자로 악성 애플리케이션(앱) 설치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 같은 범죄 양상의 변화는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찰청에서 공개한 2016년부터 2025년 사이 발생한 보이스피싱 분석 결과에 따르면 보이스피싱의 양상이 대출 사기형에서 기관 사칭형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일시적인 사회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확산하는 구조적 위협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보이스피싱에 동원되는 통신·디지털 인프라도 한층 복잡해졌다. 문자 발송 사업자와 해외 발신 경로, 인터넷전화, 피싱 사이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원격제어 애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서비스와 경로가 범죄에 활용되고 있어, 피해자는 범죄의 전모를 한눈에 파악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보이스피싱의 진화는 중국의 병법서 '삼십육계(三十六計)'의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라는 뜻의 타초경사(打草驚蛇)를 떠올리게 한다. 섣불리 움직여 상대에게 눈치를 주면, 상대는 곧바로 경계하고 다른 대응책을 찾는다는 의미다. 오늘날 보이스피싱 조직은 단속의 낌새를 눈치채면 곧바로 수법을 바꾸고 새로운 통로를 찾아 움직인다. 전화를 차단하면 문자로, 문자를 차단하면 SNS로 우회하고,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딥페이크 영상과 음성까지 동원한다.

풀을 쳤지만 뱀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깊은 풀숲으로 숨어들어 허물을 벗고, 보다 정교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개별 전화번호와 문자, 계좌를 차단하는 방식만으로는 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이제는 단편적인 차단을 넘어 통신·금융·플랫폼·수사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통합 대응체계가 필요하다.

스마트폰 주요 피싱 사례 (자료=한국인터넷진흥원)
스마트폰 주요 피싱 사례 (자료=한국인터넷진흥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피싱 ZERO'를 핵심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2024년 5월 전담 조직인 국민피해대응단을 신설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연구개발(R&D) 및 번호도용 문자 차단 등 예방부터 탐지·차단·분석·공유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대응체계를 갖췄다.

진화하는 수법을 앞서려면 범죄가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부터 알아야 하지만 그 실마리가 담긴 통화에는 피해자의 이름과 계좌번호 같은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기관 간 공유가 쉽지 않았다. KISA는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제거하고, 수법 분석에 필요한 맥락만 남기는 비식별화 기술을 개발했다. 양립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을 기술로 풀어낸 것이다. AI를 활용해 방대한 통화에서 반복되는 수법과 유사한 패턴을 찾아내고, 2만1303건의 처리 결과를 이동통신 3사와 공유해, 공동 분석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이와 더불어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되는 통신 수단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공공·금융기관과 개인의 전화번호가 불법문자의 발신번호로 도용되는 것을 막는 '번호도용 문자 차단 서비스' 이용을 확대해 사칭 문자의 발송을 사전에 차단했다.

또 악성문자가 이용자에게 전달되기 전에 발송 단계에서 탐지·차단하는 시스템을 시범 운영 후 의무화하였으며, 해외에서 유입되는 스팸 문자에 대해서도 국제문자 사업자와 협력해 자율규제를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25년 스팸 신고는 전년 대비 84%, 발신번호 변작 신고는 44% 감소했다. 불법문자와 발신번호 도용 등 보이스피싱에 악용되는 통신 수단을 사전에 차단한 성과는 실제 범죄 발생의 감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25년 9월까지 증가세를 보이던 보이스피싱도 10월 이후 7개월 연속 발생 건수와 피해액이 모두 감소했으며, 발생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37%, 피해액은 37.5% 줄었다.

이처럼 발생 건수와 피해액 모두 감소하였지만, 범죄자가 수법과 경로를 빠르게 바꾸는 만큼 축적된 신고와 범죄 정보를 분석해 새로운 유형과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고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대응하는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보이스피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피해를 억제하기 위한 핵심은 기관 간 정보 공유에 있다. 경찰청은 수사와 범죄 정보를, 통신사는 번호·계정 차단 수단을, 제조사는 단말 보안 기능을 갖고 있다. 각 기관이 가진 정보와 수단이 제때 연결되지 않으면 빠르게 이동하는 범죄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KISA가 준비하는 'AI 기반 보이스피싱 공동대응 플랫폼'은 신고 데이터와 관련 정보를 안전하게 연계하고 분석해, 각 기관이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활용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경찰과 KISA가 보유한 피싱 신고 정보를 AI로 분석해 범죄 의심 전화번호를 선별하고, 유사 수법과 반복 패턴을 신속하게 찾아낸다. 이렇게 분석한 정보는 통신사와 제조사가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돼, 통신 단계의 차단과 이용자 단말에서의 탐지·예방에 활용된다.

AI 기반 보이스피싱 공동대응 플랫폼 구성도(안)(자료=한국인터넷진흥원)
AI 기반 보이스피싱 공동대응 플랫폼 구성도(안)(자료=한국인터넷진흥원)

보이스피싱 범죄의 무서운 점은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의 수법이 막히면 다른 우회로를 찾는다. 그래서 보이스피싱과의 싸움은 속도와 끈기의 싸움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KISA는 관계부처, 수사기관, 통신사, 제조사와 함께 AI 기반 공동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국민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국민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대응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

이상중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 entcom@kisa.or.kr

〈필자〉30여년 공직생활 중, 오랜 기간 검찰에서 사이버 범죄를 수사해온 사이버보안 분야 전문가다. 이후 롯데정보통신 전문위원과 구미대 사이버보안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현재 KISA 제7대 원장으로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미래 사회 선도를 위해 AI 사이버 위협에서 정보보호 산업 진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업과 정책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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