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국·일본 키보드 배틀의 승부처는 진화를 계속한다. 다음 승부처는 '얼마나 빨리 썼느냐'보다 '얼마나 오래 읽히느냐'다.
태어날 아기를 위한 이름을 짓는 세 가족이 있다. 서울의 부모는 '하늘'이라고 적는다. 베이징의 부모는 이름을 소리로 입력한 후 나타난 여러 한자 중 '뜻'을 고른다. 도쿄의 부모는 '읽기'를 먼저 입력한 뒤 아이에게 줄 한자 표기를 고른다. 사랑은 같지만, 손가락 움직임은 나라마다 다르다. 아기 이름을 짓는 입력창 뒤에는 역사적으로 달라진 '문자 사용법'이 있다.
'한자'라는 공통의 문자 자원을 자기의 '말'과 연결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말과 한자의 연결은 한글 발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말소리와 한자의 혼용이 간결해졌다. 'ㅎㅏㄴㅡㄹ' '자모'를 입력하면 '음절'이 생성된다. 사전에 없는 별명도 한자 선택 없이 바로 입력할 수 있다. 중국어 병음 입력은 소리를 검색어로 사용하면 입력기가 소리에 맞는 글자나 단어들을 불러와 선택한다. 일본어엔 읽기를 한자로 바꾸거나 가나로 남기는 방식이 추가되어, 같은 말도 어떤 표기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울에선 자모를 조합하고, 베이징에선 글자 뜻을 맞추고, 도쿄에선 표기의 생김새까지 고른다.
문자 문화는 나라마다 다르다. 중국에서는 고전과 연계된 '어휘와 표기의 축적'이, 한국에서는 자기 말을 직접 문자화하는 '언어 자각'이, 일본에서는 '다양한 표기 병행 관습'이 특징적이다. 키보드도 달라졌다. 알파벳 중심으로 발전한 키보드에 한중일의 문자 체계를 올리려면 새 설계가 필요했다. 한글은 자모를 음절로 재구성해야 했고, 일본어는 읽기를 혼용문으로 변환해야 했고, 중국어는 제한된 수의 자판으로 수많은 한자를 다뤄야 했다.
모자라는 자판에 한자를 다 넣을 수 없지만, 짧은 단서를 입력하여 관련 정보를 불러오면 된다. 중국어 입력 기술은 '검색'과 '예측'을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역사학자 토머스 멀레이니는 이 과정을 오래된 문자를 살려내려는 노력이 낳은 새로운 글쓰기 기법이라 했다. 기계와 맞지 않는 문자가 역으로 기계 사용법마저 바꿨다. 한글은 간편하므로 이미 승부는 끝났다는 결론은 좀 섣부르다. '검색'+'변환' 기법이 입력 규칙 자체를 바꿨다. 사실 오늘날 한글과 알파벳 사용자들도 다양한 '자동완성' 기능을 쓴다. 사람은 앞부분을 입력하면 기계가 뒷부분을 재빨리 제안하는 고도의 상호작용이다. 글자를 찾아주던 도우미가 이제는 멋진 문장들까지 제시하기 시작했다.
키보드 배틀의 승부처도 바뀐다. 댓글을 입력하다가 인공지능(AI)에게 더 날카롭게 고쳐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AI는 철자만 손보는 것이 아니다. 말투와 강조점, 때로는 상대를 대하는 태도까지 변화시킨다. 한편 AI가 제안한 문장을 사용할 때도 내 책임은 커진다. 화면에 내 이름을 넣는다. 이제 엔터 키는 점점 서명 날인을 닮아 간다.
시간이 흘러 이름을 받았던 아기는 늙어지고, 그 후손이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종이 편지의 손 글씨일 수도, 오래된 이메일 텍스트일 수도 있다. 이제 세 문명의 문자 경쟁에서 더 중요해진 것은 '얼마나 빨리 썼느냐'보다 '얼마나 오래도록 읽히느냐'다. 고문서 해독은 어렵다. 중국에서는 고문의 어휘와 문법이, 한국에서는 국한문 혼용문이, 일본에서는 옛 흘림체와 문체가 해독에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지금 막 쓴 메시지라도 안심할 수 없다. 우리끼리만 아는 농담과 유행어는 미래 독자에겐 암호일 수 있다. AI가 암호 해독에 도움을 줄 것이다. 희미한 글씨를 읽고, 옛말을 풀어내고, 멀어진 목소리를 불러온다. 하지만 매끈한 번역만으론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를 보존하지 못한다. 아이의 '별명'이 평범한 '단어'로 변환되는 순간, '문구'는 매끈해져도 지명되는 '사람'은 희미해진다. 원문에 수반되는 불분명한 흔적들까지 함께 남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편지 말미에 이름이 하나 쓰여 있다. 옛날 세 도시의 부모가 화면에 처음 입력했던 그 이름, 자모를 음절로 재구성하고, 복스러운 '뜻' 문자를 고르고, 읽기와 표기 방법을 선택해서 한 생명에게 건넸던 선물. 후손은 번역문을 내려놓고 원문을 확대하여 이름을 천천히 소리 내며 읽어본다. 편지에 적힌 이름은 오래 전에 입력을 마쳤지만, 그 편지의 이름은 지금 막 도착했다.

김주한 서울대 연구부총장·정보의학·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