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35조원을 넘어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됐다. 민간을 포함한 국가 전체 연구개발비 역시 2024년 기준 131조462억원을 기록하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5%를 넘어섰다. 이스라엘에 이은 세계 2위다. 투자 지표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과학기술 선도국이다.
그러나 성적표의 뒷면은 다르다. 공공 R&D의 기술 이전율은 30.2%에 머물고, 기술을 이전받은 뒤 실제 사업화에 성공하는 비율은 19.2%에 그친다. 연구비 10억원당 사업화 건수도 0.56건에 불과하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연구 성과가 시장에 닿지 못한 채 이른바 '장롱 특허'로 쌓이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 격차를 연구자의 역량 부족이나 성과 관리의 허술함으로 돌리는 것은 손쉬운 진단이다. 문제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 공공 R&D가 따르고 있는 관리 구조 자체다.
현재 대다수의 공공 R&D는 '기획→연구개발→시제품 제작→시험·인증→ 사업화'로 이어지는 순차적 선형(Linear) 모델을 따른다. 이 구조에서 시험·검사·인증(TIC) 기능은 사실상 마지막 관문에 배치된다. 연구자와 시험·인증 전문가는 조직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개발이 거의 끝난 양산 직전 단계에 이르러서야 규제와 표준의 잣대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성능은 뛰어난데 목표 시장의 인증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설계를 되돌리고, 재시험과 재설계가 반복되며 일정과 비용이 불어난다. 그 사이 시장의 문은 닫힌다. 기술이 완성되는 시점과 신뢰가 확보되는 시점이 어긋나 있는 구조가 사업화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전력반도체와 배터리, 로봇처럼 안전성과 신뢰성 자체가 시장 진입 요건인 분야일수록 이 시차가 치르는 대가는 크다.
문제는 이 시차를 허용할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데 있다.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경쟁의 초점은 '누가 먼저 개발하는가'에서 '누가 먼저 시장에 진입해 규제와 표준을 선점하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의 무역기술장벽(TBT) 통보 건수는 2023년 처음으로 4000건을 넘어선 데 이어 2024년 4337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술 규제와 표준은 이미 비관세 장벽을 넘어 새로운 무역 경쟁의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개발을 마친 뒤에 규제를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이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최근 기술경영경제학회에 발표한 연구를 통해 R&D와 시험·검사·인증을 전 주기에 걸쳐 결합하는 '지그재그(Zigzag) R&D 모델'을 제안했다. 개발과 검증을 순차적으로 잇는 대신, R&D 전 과정에서 두 기능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 구조다.
기획 단계부터 TIC 기관이 참여해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 글로벌 표준과 목표 시장의 기술 규제를 분석하고, R&D 목표 사양을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정한다. 연구개발 단계에서는 중간 산출물을 공인 시험법으로 검증해 설계 오차와 잠재 결함을 그때그때 잡아낸다. 시제품 단계에서는 고객 요구 조건과 가혹 환경을 반영한 시험으로 품질과 규제 리스크를 미리 줄인다. 사업화 단계에서는 그동안 축적된 검증 데이터를 토대로 인증 절차를 신속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이는 전혀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미국 국방분석연구원(IDA)이 1988년 보고서에서 정리한 동시공학(Concurrent Engineering)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제품과 공정을 순차적이 아니라 통합적·동시적으로 설계하는 이 방식을 도입한 결과, 제품 개발 주기가 40~60% 단축되고 제조 비용이 30~40% 절감됐다고 보고됐다.
핵심은 단순하다. 검증을 앞당기는 것은 일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되돌리는 일을 줄이는 것이다. 이 구조는 R&D를 발주하는 정부와 수행하는 기관 사이의 정보 비대칭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검증 결과가 중간중간 객관적 데이터로 축적되는 만큼 과제가 종료된 뒤에야 성패를 확인하는 방식보다 위험을 이른 시점에 발견하고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장에서도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KCL이 협력한 한 배터리팩 제조기업은 개발 기획 단계부터 시험·인증 전문가를 참여시켰다. UN 38.3, ISO 12405, UL 2580 등 글로벌 표준을 먼저 분석해 개발 목표를 함께 설정하고, 개발 과정에서는 컴퓨터단층촬영(CT)과 비파괴 검사 등을 통해 초기 결함 요인을 점검했다. 시제품 단계에서는 충방전과 열 폭주를 상정한 스트레스 시험을 반복했다.
주목할 점은 검증의 기준이 단순히 표준 충족 여부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 폭주 발생 시 탑승자가 대피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가', '장거리 주행 조건에서 내구성이 유지되는가'처럼 시장과 고객이 실제로 묻는 질문을 시험대에 올렸다. 시험 결과는 즉시 설계에 환류됐고, 품질과 안전 리스크를 개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었다. 개발 기간을 늘린 것이 아니라 나중에 치러야 할 재설계와 재시험을 앞당겨 줄인 것이다.
이 모델이 개별 기업의 개발 기법이나 협력 사례에 머물지 않으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사업화를 목표로 하는 정부 R&D 과제의 기획 단계에 TIC 전문가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기술 전문가가 혁신성과 도전성을 설계한다면, TIC 전문가는 표준 적합성과 규제 대응, 인증 전략이라는 '출구 전략'을 함께 설계하는 구조다.
둘째, R&D 사업과 비(非)R&D 사업의 칸막이를 낮춰야 한다. 수출바우처, 신뢰성바우처, 혁신바우처, 해외규격인증획득 지원사업처럼 시험·인증과 시장 진입을 돕는 제도는 이미 여러 부처에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R&D가 끝난 뒤에야 별도의 신청 절차와 재원을 거쳐야 하는 구조에서는 정작 지원이 필요한 시점을 놓칠 수 있다. R&D 사업비 안에 TIC 바우처를 반영하거나 부처 간 사업을 연계해 하나의 연속된 사업화 경로로 작동하도록 설계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성과 평가의 눈금을 바꿔야 한다. 논문 수와 특허 출원 건수, 기술성숙도(TRL) 상승만으로는 사업화 성과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렵다. 제조 성숙도, 규제 적합성, 인증 획득, 시장 진입 소요 기간 같은 시장 관점의 지표가 함께 놓일 때 연구 현장은 초기 단계부터 신뢰성과 시장성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KCL은 수많은 시험·인증과 R&D, 기업 지원 현장을 경험해 왔다. 그 경험이 일관되게 가리키는 지점이 있다. 기술의 성패는 개발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증이 언제, 어떻게 개입하느냐가 기술이 연구실을 넘어 시장에 도달하는 시간을 좌우한다.
TIC는 더 이상 기술개발이 끝난 뒤에 밟는 사후 절차나 보조적 기능이 아니다. 개발된 기술을 시장의 요구와 규제 환경에 연결하는 '신뢰의 가교'이자 연구의 방향을 시장으로 돌려세우는 전략적 나침반이다.
해마다 130조원대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하는 나라에 걸맞은 결실을 거두려면 이제 개발과 검증을 분리된 절차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술을 개발한 뒤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하면서 검증하고 검증의 결과를 다시 개발에 반영해야 한다.
지그재그 R&D 모델은 그 전환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다.
천영길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 원장 kclpr@kcl.re.kr
〈필자〉1994년 제30회 기술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통상산업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와 과학기술정책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통령 직속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부단장, 산업통상자원부 중견기업정책관·기획조정실 정책기획관, 에너지전환정책관·에너지정책실장, 전기위원회·무역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2024년 11월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 제6대 원장으로 취임해 시험·인증 분야의 경쟁력 강화와 연구기관 혁신을 이끌고 있으며, 2026년부터 무역발전표준협력기구(ODCCN)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