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몇 초 만에 원하는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 편리함의 상징인 '자판기 문화'가 대한민국 과학기술, 특히 정보통신기술(ICT) 연구개발(R&D)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정부 예산이나 기업의 투자가 집행되면, 마치 자판기처럼 단기간에 '세계 최초' 혹은 '세계 최고'의 원천 기술이 뚝딱 산출되기를 기대하는 조급증이다. 투자대비수익률(ROI)과 단기 성과 중심의 정량 평가 시스템은 연구자들을 매일 벼랑 끝으로 내몬다.
그러나 인류의 삶을 바꾼 전파(RF) 공학의 위대한 역사 중에서 자판기처럼 단번에 작동한 혁신은 없었다. 전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 매질과 주파수를 다루는 학문이다. 시뮬레이션에서 100% 완벽했던 예상 결과가 실제 필드 테스트에서는 나뭇잎 하나, 오늘 아침의 습도 등의 미세한 오차로 완전히 무너지는 일이 다반사다. 전파 연구는 '실패의 데이터가 쌓여야만 문이 열리는' 축적의 학문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와이파이(Wi-Fi) 탄생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호주 연방과학원(CSIRO)의 존 오설리번 박사팀은 우주에서 날아오는 희미한 원시 블랙홀의 전파 신호를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주 먼지와 가스에 가로막혀 신호가 사방으로 뒤틀리고 왜곡되는 탓에 연구는 수십 년간 '완벽한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반전은 1990년대 일어났다. 연구진은 우주 전파의 왜곡을 복원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발했던 수학적 신호 처리 알고리즘(Fast Fourier Transform)을 실내 무선 통신에 접목하는 전략의 변환을 꾀했다. 벽과 장애물에 부딪혀 통신이 끊기던 실내 전파 간섭 문제를 우주 연구의 '실패 자산'으로 해결한 것이다. 우주 블랙홀 탐사의 실패가 인류를 선(線)이 없는 초연결 시대로 이끈 변곡점이 됐다.
현재 검토되는 초고주파(mmWave·밀리미터파) 무선 기술 또한 한때 “벽도 못 뚫는 쓸모없는 전파”라는 공격받은 대역이다. 직진성이 너무 강해 손바닥으로 가리거나 비만 와도 신호가 끊기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이다. 현재의 무선 통신 인프라 관점에서 대규모 상용화가 불가능하다는 혹평 속에서도 연구자들은 실패를 자산으로 삼아 빔포밍 기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결과, 초고주파 기술은 무선 통신을 넘어 비지상 통신(위성), 자율주행 레이더, 국방 분야 등에서 뚜렷한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이 두 가지 비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단기 성과만 압박하는 '자판기 문화' 속에서는 제2의 와이파이도, 대한민국만의 6G 원천 기술도 태어날 수 없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연구 환경은 연구자들이 외국산 칩이나 오픈소스를 적당히 짜깁기해 외형만 국산화하는 '안전한 모방'에만 머물게 만든다. 이는 결국 국가 핵심 지식재산권(IP)의 종속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뿐이다.
진정한 결실은 종종 엉뚱한 밭에서 열리곤 한다. 애초 계획했던 타깃(A) 달성에는 실패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축적된 유의미한 실패 데이터와 파생 기술을 과감히 다른 영역(B)으로 전환해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피벗(방향 전환)의 미학'이 필요한 이유다.
정부와 산업계의 리더들은 이제 전파 R&D를 하나의 고정된 정답만 요구하는 자판기가 아니라, 때로는 유연하게 진화하는 유기적인 연구 생태계로 바라봐야 한다. 처음 세운 세부 목표의 도달 여부를 따지는 평가에서 벗어나, 단기적 실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연구 목표의 과감하고 유연한 변경을 전폭적으로 허용하는 풍토의 조성을 제언한다. 이러한 성실한 실패와 유연한 전환이 제도적으로 보장될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추격자를 넘어 글로벌 ICT 패러다임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로 거듭날 것이다.
홍원빈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교수·한국전자파학회 상임이사 whong@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