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경쟁 도입과 전화번호 체계

인문사회계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정보 통신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정보 통신의 특징이 연결성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고구마 줄기 예를 들었다.

전화가 집안에서는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장치와 매 한가지로 보일지 모르나 만일 전화줄을 잡아당겨 고구마 줄기처럼 끌어낼 수 있다면 8억대나 되는전화들이 줄줄이 끌려 나오게 될 것이라고. 그러자 학생들은 새삼스럽다는표정을 지었다. 약간만 생각을 해봐도 곧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평소 전화 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보 통신의 본질을 잘 깨우쳐 주는 이야기가 된다. 정보 통신은 곧서비스이다. 그리고 최고의 서비스는 사용자가 별도 예비 지식 없이도 쉽사리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이다. 계층화 개념으로 말한다면 사용자는 최고의 계층에 있으므로 하부 계층의 기능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도 사용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정보 통신에 경쟁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서비스를 향상시키 기위한 것이다. 독점 상황에서는 소홀해질 수 있는 서비스품질과 사용요금및 이용편의를 경쟁을 통해서 향상시키자는 것이다. 안일한 경영이 초래할 수있는 사용자에 대한 초과부담을 경쟁을 통한 효율 경영으로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 도입 조치는 모두 하부구조의 일이기 때문에, 사용자는 경쟁 도입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정보통신을 계속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시외전화 경쟁 도입을 두고 번호 체계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검토가 진행 중인것으로 안다. 추가 사업자 선정 이전에 마무리지었어야 했을 일을 뒤늦게처리하다 보니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 같다. 그 중에는 공정성 도모를 위 해기존의 시외접속번호 0을 폐하고 기존 사업자와 신규 사업자에 081과 082 를나란히 부여하는 방안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외양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용자들을 당황시키는 처사로, 크게 우려가 된다. 어느 날인가 부터 갑자기 종전대로 02, 042를 돌려서는 시외전화가 안되고 그에 앞서 081이나 082를 반드시 돌려야만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농수산물 유통서비스를 제공하는 농수산시장에 비유한다면 이러한 이야기 가되겠다. 농수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고 신선한 농수산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농수산물 유통에 경쟁을 도입하면서, 사업자간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기존사업자의 유통단지를 폐쇄하고 신규 사업자와 같은 곳에 나란히 이전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용자의 편의를 무시한 월권적인 조치가 된다.

농수산물유통단지 선정문제는 정보통신망에 있어서는 사업자 식별번호문제 에 대응된다. 마땅히, 기존의 식별번호를 존속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번호를 추가함으로써, 이러한 변화에 신경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계속 서비스받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08번을 이러한 목적에 사용하는 그 자체에 있다.

남북통일이불시에 찾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현실에서 07, 08, 09는 북한지역번호 할당을 위해 확보해 둬야 한다. 02~06의 다섯개 번호를 남한지역에 사용하면서 07, 09 두개만을 북한지역에 할당할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현재 클로버서비스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080번도 서둘러 다른 번호로 바꿔야 하며, 더욱이 081, 082등을 사업자 식별 번호로 할당해서는 안된다. 또 0번에 대응하여 10번을 제2사업자에게 부여하자는 의견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이 경우에는 기존의 특수 번호들과 중복되기 때문에 여러가지 혼선을 빚게 되고 또 제3사업자 선정시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등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그러므로 시외전화 경쟁도입시 신규 사업자들에게는 통신망 식별용으로 기 설정된 01계열 번호들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순리적인 해결책이 되겠다. 이 경우 신규 사업자에는 상대적으로 긴 번호가 할당되겠지만 이것은 사용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정도의 불리한 여건은 품질향상, 서비스 다양화, 요금 인하, 홍보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 극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사전지정방식 등을 도입해서 사용자가 추가번호를 돌리지 않아도 되도록 점차 바꿔나가는 것이바람직하다. 국내정보통신시장에 있어서의 경쟁도입은, 한편 해외서비스시장 개방에 대비한 경쟁력완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독점영역이 깨어지는데에 따른 위기감과 신규 사업체의 역동적인 도전을 자극삼아 경쟁력강화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려면 무엇보다도 독점사업 영역에 새롭게 뛰어드는 신규사업자가 후발주자로서의 불리한 여건을 감수하고 도전 하는 전력투구의 자세가 필요하다. 권투시합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따기 위해 적지에 뛰어드는 도전자와 같은 비장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