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다이얼. 여전히 통화중.
초저녁에 김창규 박사로부터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칩을 분해했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그 이후가 궁금한 것이었다.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칩.
김지호 실장은 광화문 네거리 맨홀에서 발생한 화재와 일련의 통신사고가 그 독수리가 그려진 칩 때문일 것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김지호 실장은 원세개에 대한 생각의 끝을 이어갔다.
조선과 청국 간에 연결된 전신을 이용하여 온갖 횡포를 다하던 원세개는 동학 농민군들의 봉기가 있자 청국에 군대의 진주를 요청했다. 하지만 청국군이 진주한 후 곧바로 일본군이 진주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전력을 볼 때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과, 어물어물하다가는 조선을 일본 쪽에 놓아주었다는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세개는 1894년 6월 12일 청국 정부로 한 장의 전보를 발송했다.
『본인은 본래 소갈증이 있는데다가 요즘 오랜 설사 때문에 기가 허해져서 간밤에는 머리가 몹시 혼미하고 온몸이 아팠다. 곧 양의사를 불러 진찰해 보니 열이 1백도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에 얼음을 놓았더니 신열이 좀 내렸다. 아직 몸이 크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사정이 지금 복잡 다단하기 짝이 없는데 본인은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고 일이 없으니 그것이 걱정이다. 본인 대신에 당소의에게 이곳 일을 맡기기 바란다.』
원세개는 1894년 6월 17일 귀국허가를 받았다. 앞으로 조선 정부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그날밤 조선 정부와 서울에 주재하던 다른 외교관에게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 서울을 빠져나갔다.
허술한 가마에 호위 한 사람 없이 허겁지겁 밤길로 인천에 도착, 18일 새벽 귀국해 버렸다.
원세개가 도망치고 나자 조선의 정세는 급변했다. 청국의 위세는 땅으로 곤두박질쳤고 일본의 위세가 그날로 판을 치기 시작했다.
원세개가 도망치고 난 후 일본의 즉각적이고 노골적인 압력 행사했다. 일본은 통신시설뿐만 아니라 당장 일본군이 묵을 숙소와 완전한 청국군 철수, 조선과 청국 사이에 맺어진 통상조약의 폐기를 요청해왔다. 다음날도 아니었다. 원세개가 도망친 바로 그날 오후였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원세개의 뒷일을 맡은 당소의는 청국의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내 사태를 설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선은 불통이었다.
통신의 장악과 두절.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일전쟁의 승부는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