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하반기 컴퓨팅 뉴트렌드]뉴페이스-장수 CEO 누가 있나

흔히 컴퓨팅 업계의 장수CEO라 하면 이미 13년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 강병제 전 한국오라클 회장으로부터 오창규 전 한국IBM 사장(6년), 최근 퇴임한 정형문 전 한국EMC 사장(8년), 안경수 전 한국후지쯔 사장(7년)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강 회장 이후 부터는 대부분 햇수로 7∼8년 정도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물론 이들과 비슷한 기록으로 아직 현직에 남아있는 신재철 한국IBM 사장과 최준근 한국HP 사장이 강 회장의 기록에 얼마나 근접할 지, 혹은 깰지도 지켜봐야 한다.

  다국적IT기업의 ‘장수 CEO’에 대한 관심은 이미 기간 그 자체의 의미를 벗어났다. 한 두명의 사례라면 모를까 이미 웬만한 규모의 지사라면 이제는 내부 승진을 통한 CEO 선임이 관례화됐고, 또 안정적인 재임 속에 ‘경영활동’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수 CEO에 대한 관심은 ‘잘 하니까 오래한다’는 상식 속에 그들이 재임 기간 중 보여준 CEO의 자질과 덕목에 모아지고 있다. 매출이 적게는 수천억원에서 조단위에 이르고, 수천여명의 직원들을 관리해야하는 외국계 지사는 이미 국내 기업과 매한가지의 경영능력을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기업을 오랜동안 이끈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만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은 자기만의 경영철학이 있었고, 이런 경영철학은 국내 IT 산업에 대한 발전에 일조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근무하는 직장으로서 필요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본사와 협상력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정형문 사장의 ‘개량한복 협상’은 대표적인 일화로 꼽을 만 하다. 지난 98년 IMF 외환위기 때 정 사장은 개량한복을 입고 본사를 방문했는데, 본사에서는 국내상황을 들먹이며 신용장(LC)을 개설할 은행들을 직접 지정하고, 거래시 고객사로부터 담보설정을 할 것을 요구하던 터였다. 정 사장은 당시 “우리가 거래하는 기업들이 망하면 한국이 망하고 한국EMC가 망한다. 그 기업들은 절대 망하지 않고 내가 있는 한 한국EMC는 망하지 않는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정 사장은 2천만달러 외상 거래를 본사로부터 얻어냈고, 국내 기업들은 신용장을 열 수 있게 됐다.

 본사의 지원 없이 사재를 털고 은행 대출을 받아 100회가 넘는 무료 IT세미나를 개최하고 대학교에 DB를 기증하는 등 길고 지루한 소프트웨어 밑거름 뿌리기를 감행한 강병제 회장의 ‘뚝심’도 다시 새겨볼 만 하다. 본사의 지원이 있었다면이야 영업 포석으로 폄하할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당시 국내 IT 환경에서 이같은 개인적인 노력은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본사 등재 임원으로 발탁된 안경수 한국후지쯔 회장 역시 IMF 외환관리 상황에서 오히려 눈부신 성장을 이끌어 낸 탁월한 경영자질을 평가받았다. 무엇보다 후지쯔 본사의 신임 CEO가 본사의 체질개선과 경영혁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국인도 유능한 경영자의 자질을 인정받아 외국계 IT기업 본사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국적 IT기업 본사에게 지사는 냉정하게 영업망에 불과하다. 우리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지인들에 대한 불만과 고민이 직접적으로 다가올리 만무하다. 장수CEO가 비단 영업력에서만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것이 아닌 기업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때 ‘장수’의 의미는 빛날 것이다.

<신혜선 shinhs@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