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즈쿠리’ 그리고 ‘스리아와세’.
일본 제조업 경쟁력을 애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두 단어다. 모노즈쿠리(物造り)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장인정신을 말한다. 도쿄대학 후지모토 다카히로 교수가 처음으로 사용한 스리아와세(擦り合わせ)는 ‘서로 부딪치며 세밀하게 조정, 통합한다’는 뜻이다. 자동차, 디지털가전, 액정 등 제조분야에서 업체 간 치밀한 협력관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정해진 표준만 따르지 않고 조금씩 다른 공정을 시도함으로써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본 고유의 효율적인 생산체계를 통칭한다.
실제로 지난 1970~1980년대 일본 기업들은 ‘모노즈쿠리’ 정신으로 무장한 엔지니어들을 앞세워 ‘스리아와세’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해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해 왔다. 그 배경에는 제조업체끼리의 끈끈한 내부 협력과 기술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디지털 방식이 확산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복수의 부품으로 구성된 덩어리(모듈)를 조립해 제품을 만드는 모듈형 생산이 주류를 이룬다. 제조장비와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하면 어떤 업체라도 원하는 제품을 손쉽게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이 자랑하던 수직통합형 기업구조의 ‘스리아와세’ 방식이 오히려 경쟁력을 갉아먹는 독(毒)으로 작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TV다. 기존 브라운관이 액정이나 플라즈마와 같은 박막형 TV시대로 바뀌면서 생산구조도 수직통합형에서 수평분업형으로 전환됐다. 그 결과 새로운 강자(强者)가 등장했고 일본 TV업체들은 지금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10년 전 TV 생산구조가 바뀐 것처럼 콘텐츠가 생명인 스마트TV와 파워트레인(동력장치) 대전환이 일어날 전기자동차 시대에도 이 같은 기업구조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제조분야에 기술적 차이가 사라지면서 과감하고 발 빠른 투자로 새로운 서비스 모델과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자가 시장을 지배하는 시대가 왔다. 이처럼 사라지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시나리오다. 유비쿼터스 컴퓨팅을 처음 제안했던 마크 와이저(Mark Weiser)도 “가장 성숙한 기술은 사라지는 기술(disappearing technology)”이라는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추어진(embedded) 형태로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calm) 처리하는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시장 환경에서 늘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업에 미래 시나리오는 필수다. 현재의 문제에 허덕이며 미래를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이다. 그러나 미래 현상을 불러오는 결정적인 요인은 반드시 현재에 존재한다. 바다 한가운데서 지진이 발생하면, 몇 분 후 가까운 해변에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은 상상이나 우연이 아닌 필연(必然)이다. 제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제 잠시 후면 전 세계 시장에 쓰나미가 밀어닥칠 차례다.
주상돈 전자담당 부국장 sd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