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은 김정식 회장이 인쇄회로기판(PCB) 사업에 뛰어든 해다. 그는 전자산업이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거침없이 사업에 매진했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김 회장 예상대로 PCB는 중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생전 “누군가 내게 'PCB는 앞으로도 살아남을까?'라고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번 위기를 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역설했다. 그는 “50년 동안 위기는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는 준비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대덕의 탄생

김 회장이 전자산업에 발을 디딘 것은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전기과 재학시절 은사인 온현위 박사는 당시 김 회장에게 “학교에서 배운 전공은 어디다 버려두고 다른 일을 하느냐”며 꾸지람을 들었다. 그날 이후 김 회장 머릿속에는 전공을 살려 전자사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산업 현장에서 PCB 산업에 대한 발전방향을 확인, 한국에서 변화가 일어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시작은 초라했지만 일본에서 기술연구를 거친 후 국내 최초 단면 PCB 탄생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그에게 남은 숙제는 오랜 개발기간에 따른 재정난. 흑자전환에 대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거침없는 성장

1980년 11월 대덕전자를 비롯한 전자산업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각 방송사의 컬러TV 방영을 허락한다는 소식이었다. 대덕산업은 국내에서 컬러TV 생산이 시작된 1974년부터 줄곧 컬러TV용 PCB를 생산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은 대덕산업이 반월공단으로 공장을 옮기면서 처음으로 자동화설비를 도입했던 해로 전자산업계에서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반도체 패키지·스마트폰용 PBC 부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뛰어들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글로벌로 도약하다

1996년 5월, 대덕전자 자회사인 대덕필리핀(DDPI)이 탄생했다. 대덕필리핀은 국내 PCB업체가 처음으로 만든 해외생산기지였다. 이후 대덕은 중국 톈진(天津)에도 PCB 공장인 '천진대덕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중국 현지와 합작 형태로, 2003년 하반기부터 가전용 단면 페놀 PCB 생산에 착수할 수 있었다. 2002년에는 휴대폰용 빌드업(Build-Up) PCB가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빌드업 PCB 성공은 대덕전자 메인 품목이 통신장비와 PC용 기판에서 휴대폰용 메인기판으로 완전히 전환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7년 스마트폰 출현은 PCB 업계에서 또 다른 변화를 예고했다.
◇대덕의 경영철학

50년 동안 대덕을 경영하면서 김 회장이 늘 마음에 새겼던 단어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경천애인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자연 섭리를 따르고 인간을 사랑하며 살라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김 회장은 늘 직원에게 “인화로 단결하고 창의로 공부하며 책임을 완수하자”고 말했다. PCB는 물리의 법칙과 화학기술·각종 기계기술을 동원해 만드는 제품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는 언제나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했다. 그리고 “기술은 곧 사람”이기에 작은 씨앗을 뿌리는 심정으로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신념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대덕의 정신

김 회장은 “PCB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PCB 전문가가 돼야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이든 친구든, 누군가 PCB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질문에도 술술 대답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 회장이 품질혁신을 위해 1988년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지속해온 캠페인이 있다. 바로 'FINE 운동'이다. 불확실하게 급변하는 전자기술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기술, 품질, 고객의 요구, 환경규제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회사체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미래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마음으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면 우리가 당면한 위기 역시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최재필기자 jp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