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별세] '세계의 삼성' 일군 이건희 회장

1987년 12월 이건희 회장 취임식
1987년 12월 이건희 회장 취임식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삼성 성장 추이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지난 1987년 12월 1일, 삼성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이 회장은 삼성을 경영하며 취임사에서 했던 이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도 안됐던 삼성그룹 매출은 2018년 현재 387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어났다.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반도체·스마트폰…IT 강국 초석 마련

1974년 이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당시 반응은 'TV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 등으로 부정적이었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기술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삼성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꾸준한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삼성은 반도체 경쟁력을 키워왔다. 1986년 7월 삼성이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했다.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반도체를 성공한 이후에는 애니콜 신화가 이어졌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 회장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95년 8월 애니콜은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랐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1993년 신경영 선언
1993년 신경영 선언

◇신경영 선언 등 위기 극복 리더십

1992년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이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세계 무대에서 1위에 올랐지만, 이 회장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 회장이 감지했던 위기는 예상보다 빨리왔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의 글로벌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 이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다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발견했다.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다. 이를 본 이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사업 체질을 바꿨고, 가파른 성장세에 접어들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있을 때,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 중이던 이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이 회장의 질책과 함께 삼성은 내부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지 1년 후인 1997년,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위기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학력 폐지·여성 중시…사회 문화 변화를 이끌다

삼성은 1957년 1월,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했다. 1995년에는 공채에 학력 폐지라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 회장이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가는 열린 시대를 맞아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한데 따른 조치다.

이때부터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에 합격할 실력만 되면 대학 졸업장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됐다.

여성 인력에 대한 변화도 일어났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과감히 없애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생과 동반성장도 이 회장이 강조한 부분이다. 이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에도 이 회장은 작게는 삼성의 발전을 위해, 크게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업체 육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한발 더 나아가 1996년 신년사에서는 “협력 업체는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신경영의 동반자입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노조 경영 등 문제점도 있었다. 삼성이 창업 이후 지속해 온 무노조 경영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무노조 경영을 위한 불법 행위도 있었다. 삼성은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사회와 함께 성장하기 위한 변화를 시작했다. 지난 5월 이재용 부회장은 '무노조 경영 폐기'를 선언하며 새로운 삼성이 되겠다고 밝혔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