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29>국내 첫 대형컴퓨터 도입

1969년 10월 23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전자계산실의 한국 최대 컴퓨터(CDC 3300)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69년 10월 23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전자계산실의 한국 최대 컴퓨터(CDC 3300)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69년 6월 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미국 컨트롤데이터코퍼레이션(CDC)에 주문한 대형컴퓨터 CDC3300 기종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포트란과 코볼 등 고급언어를 알아듣는 한국 최초의 대형 컴퓨터였다. 당시 인천항은 접안 시설이 좁아서 컴퓨터를 싣고 온 배는 바다에 정박하고 작은 배가 바다로 나가서 컴퓨터를 육지로 옮겼다. 컴퓨터는 크기가 집채만 했다. 가격도 100만달러에 달했다. 당시는 부품을 들여와서 컴퓨터를 조립했다. 자칫 부품이 바다에 빠지면 엄청난 피해가 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천항에는 경찰이 나와서 주변을 통제했다.

도착한 컴퓨터는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컴퓨터는 대형 트럭에 실어서 경인도로를 타고 서울에 있는 연구소로 운반했다. 차량 앞뒤로는 경찰 차량이 삼엄하게 호위했다. 트럭 옆에는 '한국 최대의 전자계산기'라는 현수막을 내걸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잡았다.

기술연구소가 국내 첫 대형 컴퓨터인 CDC3300을 도입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연구소는 컴퓨터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시절인 1967년 9월 14일 전산실을 발족시켰다. 최형섭 연구소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그해 12월 초대 실장에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2년여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성기수 박사를 발탁했다. 성기수 박사는 자체 조사한 한국 전산 수요를 바탕으로 1968년 4월부터 대형 컴퓨터 도입을 추진했다. 기종 선정에 잡음이 없도록 경쟁입찰 방식을 채택했다. 1차로 입찰에 참가한 5개사 5개 기종에 대한 평가를 진행, 그 가운데 2개 기종을 탈락시켰다.

1차 평가를 통과한 제품은 IBM, 버로스, CDC 등 3개 기종이었다. 2차는 기술평가를 했다. 전산실은 포트란 언어로 작성한 85종의 프로그램과 코볼 언어로 만든 5종 등 90종의 프로그램을 입찰 업체에 주고 실행 결과를 제출토록 했다. 그 결과 문제를 제대로 푼 것은 IBM과 CDC 기종이었다. 버로스의 경우 연구소가 제시한 90종 가운데 10종만 처리, 실격됐다. 3차 평가 결과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한 CDC3300을 최종 도입 기종으로 선정했다.

순조롭던 컴퓨터 도입에 갑자기 빨간불이 들어왔다. 6월 중순 어느 날 청와대 A 과학담당 비서관이 성기수 박사를 청와대로 불렀다. “컴퓨터 기종을 버로스로 바꾸시오. 안 그러면 예산을 지원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버로스 기종은 우리가 보낸 문제를 다 풀지 못한 컴퓨터입니다. 그런 컴퓨터를 어떻게 도입한단 말입니까. 이번 컴퓨터 도입은 한국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평가 결과대로 도입해야 합니다.”

“기종을 바꾸지 않으면 예산을 전액 삭감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래도 기종 변경은 할 수 없습니다.” 기종 변경 문제는 전자계산조직도입조정위원회의에서도 논란이 됐다. 전자계산기 도입과 개발 활용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는 위원회는 과학기술처 차관이 위원장직을 맡고 관계부처 국장과 전문가 등 17명으로 구성됐다. A비서관은 회의에 참석해 기종 변경을 거듭 요구했다. 성기수 박사는 반대 입장을 굳히지 않았다.

위원회는 1968년 8월 CDC3300 기종 도입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그 대신 5년 동안 월 1만6000달러씩 사용료를 내는 임대 방식으로 기종 도입을 승인했다. 그해 8월 20일 연구소는 CDC와 도입 기종 계약을 체결했다. 최형섭 연구소장은 이 일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종 선정에 관해 성기수 박사의 판단을 존중했다. 당시는 전문가 시대였다.

연구소에 도착한 컴퓨터는 1969년 6월 21일부터 3개월여 동안 가동 준비를 했다. 그해 10월 23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 최형섭 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가동식을 거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성기수 박사 안내로 기종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시동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컴퓨터가 '애국가'와 '달 타령'을 연주하는 게 아닌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프린터로 모나리자 그림을 인쇄하고 한국 지도를 만들어서 참석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육영수 여사가 이를 지켜보며 말했다. “이 기계로 돈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구소는 그해 말부터 전산실에 컴퓨터 교육반을 꾸려서 국내 첫 컴퓨터 인력을 양성했다. 성기수 박사는 그해 11월 말 MBC TV에서 매주 수요일 밤에 방영한 '명교수, 명강의'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성기수 박사는 '미래 사회는 컴퓨터 시대'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이튿날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께서 이 프로그램을 보시고 '청와대 직원들도 이 강의를 듣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강의를 해 주십시오.” 성기수 박사는 이튿날 청와대 직원 대상으로 특강했다. 이것이 소문 나자 성기수 박사는 일약 스타강사로 떠오르면서 부처, 국영기업체, 은행 등의 초청을 받아 컴퓨터 특강을 했다.

1970년 4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월례 경제동향 보고회의에서 성기수 박사는 30분 동안 '예산 업무 전산화와 행정 전산화' 브리핑을 했다. 성기수 박사의 회고. “이날 정부 업무 효율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정부는 행정 전산화를 해야 하고 상업고교에 주산 대신 코볼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공업고교에는 컴퓨터 수치제어와 포트란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이 건의에 대해 당시 문교부 장관이 “컴퓨터 구입 예산과 인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튿날 경제기획원 장관과 문교부 장관, 과학기술처 장관에서 친필 메모를 보내 '성기수 박사의 건의를 즉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71년부터 고교 실업계 교과서가 전면 개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또 각 부처 장관들에게 컴퓨터를 행정에 적극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어느 날 김학렬 부총리를 비롯한 10여명의 장관들이 예고없이 컴퓨터 교육을 받으러 연구소 전산실을 찾아왔다. “아니 제가 가면 되는데 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김학렬 부총리가 말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찾아오는 게 도리 아닙니까.”

경제기획원은 예산업무 전산화 프로젝트를 연구소 전산실에 맡겼다. 전산실이 수주한 첫 대형 정부 프로젝트였다. 경제기획원에서 이런 제안은 강경식 당시 예산과장이 처음 했다. 강경식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의 증언. “당시 예산편성이 끝나면 은행원들이 주판으로 집계를 했습니다. 이 작업이 끝나야 부문별 예산 내역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예산업무 전산화는 가장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1970년 6월 21일 연구소 전산실과 서울 광화문 경제기획원 간 데이터 통신망을 개통했다. 전산실은 1971년 각종 정책 자료를 도출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예산 집행과 결산 등 재정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예산시스템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당시 미국에도 없었다. 연구소 전산실은 이를 계기로 100여건의 공공 업무 전산화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성기수 박사는 “정부와 기업체 등에서 각종 프로젝트가 홍수처럼 밀려왔다”고 회고했다. 전산실은 이어 서울시 전화요금 업무 자동화, 여권과 주민등록 전산화 시스템, 대학예비고사 전산 처리, 중학생 학군배정 처리, 행정 전산망 충북도 시범사업 등을 완벽하게 추진했다. 전산실은 88서울올림픽 경기 운영과 관리, 경기 결과 처리시스템도 개발했다. 당시 정부는 경기시스템 개발을 외국 업체에 맡길 방침이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미국 업체에 용역을 맡기라고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성기수 박사는 노태우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전 대통령)을 두 번이나 찾아갔다. 성기수 박사가 전한 당시 노태우 위원장과의 대화 내용. “연구소 전산실에 경기시스템 개발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는 올림픽 경기 시스템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연구소 전산 인력은 외국보다 못한 게 없습니다. 저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한국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소프트웨어(SW) 산업이 발전합니다. 이 일은 국가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이런 곡절을 거쳐 개발한 경기시스템은 완벽했다. 국내외 기자 4000여명은 각종 경기 결과를 이 시스템으로 실시간 송고했다. 외국 언론은 올림픽 사상 최고의 '장외 금메달'감이라며 한국 시스템을 극찬했다. 5공화국 시절인 1982년 전산실은 연구소 부설 전산개발센터로 확대 개편했다. 이곳에서 금융실명제를 준비했다. 30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전산시스템을 개발하고 1983년 1월부터 금융실명제를 시행키로 했다. 금융실명제는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 8월 12일 전격 실시됐다. 걱정하던 시스템 오류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행정 전산화는 누구도 가 보지 않은 모험의 길이었다. 그러나 개발센터의 지속적인 과학기술 축적과 전산화로 한국은 전자정부 세계 1위라는 정보화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