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디자인, 산업 혁신과 기업 성공의 키워드

“디자인할 것인가 쇠망할 것인가”(Design or Decline) 1987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연설 중 한 말이다. 대영제국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유럽 경제 중심역할을 하던 영국은 1970년대 후반 기술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뒤처지기 시작하며 IMF 긴급 구제자금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높은 실업률과 장기침체 탈출구로 '디자인'을 활용할 것을 주문했다. 1990년대 후반 영국은 제조업 쇠퇴와 금융업 한계에 부닥치며 또다시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1997년 블레어 정부는 국가 경제 활성화의 대안으로 디자인, 영화, 음악, 건축 등 창조산업을 대안으로 채택하며 '창조영국'을 국가 어젠다로 설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정부 주도 디자인 정책이 처음 수립되고 진흥을 시작한 시점은 1968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면서부터다. 당시 우리나라는 수출 목표 10억달러를 발표하고 수출품에 각별히 신경 썼는데 당시 가장 문제로 대두됐던 것이 '포장'이었다. 포장디자인 자체도 조악했지만 수출품이 해외로 가는 도중에 포장이 훼손되기 일쑤였다. 이에 정부는 '미술수출'이라는 구호 아래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현 한국디자인진흥원)를 설립하고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수출품 포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디자인포장센터는 포장 지원 말고도 교육, 공모전 등 다양한 사업을 실시했는데 최초 디자이너 등록제를 실시할 당시 등록한 디자이너가 233명이었다.

52년이 흐른 지금 디자인 인력 규모는 33만6000명,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등록된 디자인 전문기업만도 1만여개에 달한다. 디자인 산업 규모는 2019년 기준 18조3000억원이다. 50여년간 디자인산업 인프라도 크게 증가했다.

[ET시론]디자인, 산업 혁신과 기업 성공의 키워드

디자인 역할 역시 시대 상황에 따라 아우르는 영역이 크게 확장됐다. 포장, 시각, 제품디자인에서 1990년대 웹, 사용자인터페이스(UI), 디지털디자인, 2000년대 들어서는 사용자경험(UX)디자인과 서비스·융합디자인이 새로운 범주에 들어왔다. 확장된 디자인 인프라만큼이나 디자인 위상도 높아졌다. 2007년 국가디자인경쟁력은 세계 9위를 기록했고, 2020년 영국의 권위 있는 월간지 모노클은 독일에 이어 한국 소프트파워 경쟁력을 2위로 평가했다. 또 우리나라는 휴대폰, 자동차 등 주력산업의 수출 기여도가 높은데 이면에는 제품 품질뿐만 아니라 디자인 수준의 비약적인 발전이 큰 몫을 했다는 게 중론이다.

[ET시론]디자인, 산업 혁신과 기업 성공의 키워드

많은 사람이 디자인 우수기업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애플은 2018년 8월 미국 기업 최초 시총 1조달러를 넘어섰고, 최근 시가총액 3조달러까지 돌파했다. 일찍이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이 제시하면 이에 맞춰 기술을 적용하라”고 할 정도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국내 대기업 역시 새해 들어 디자인 본질인 고객경험(User Exprience)에 초점을 두고 조직개편과 그룹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기업이 앞다퉈 디자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적 컨설팅 기업 매킨지는 소위 잘나가는 회사 300개를 대상으로 디자인 활동이 활발한 정도에 따라 4분위로 구분해 5년간 매출액 증가율을 분석했다. 상위 1분위는 10%, 2분위는 6.3%, 3분위는 4.6%, 4분위는 4%로 증가율이 산출됐다. 디자인 활동이 왕성한 기업일수록 매출 증가율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디자인은 미학이 기본이 되지만 근본은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는 소비자 요구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라 하더라도 소비자가 사용하기 불편하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최고 혁신적인 상품도 미적인 매력이 없다면 시장에서 외면받기 쉽다. 이처럼 소비자 수용도와 심미적인 만족감을 주면서 적은 투자비용으로 더 큰 부가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디자인은 기업에 매력 요소이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 경제포럼 회장은 2016년 저서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하는 일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류 자체를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변화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불어닥쳐 변화를 가속했다. 관광, 전시 등 마이스(MICE)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비대면 사업인 가전, 반도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나 바이오산업은 호황을 맞았다. 특정 산업 흥망성쇠를 넘어 모든 산업이 디지털 전환과 산업지능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업종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비즈니스 모델이 제품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제품과 서비스, 거기에 인공지능(AI)이나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사물인터넷(IoT), 플랫폼이 결합한 형태의 새로운 모델이 창출될 것이다. 가령 자동차 산업이 제조 개념을 넘어서 IT와 결합해 운전자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자율주행이나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까지 고려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디지털화와 산업 융합이 조화롭게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혁신적인 생각,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창의적인 디자인이다. 결국 디자인은 산업 일부가 아닌 산업 전반에 거쳐 관여하며 기술과 융합해 소비자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디자인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 syoon@kidp.or.kr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필자소개>윤상흠 원장은 1991년 제35회 행정고시 합격 후 산업자원부 자원팀장, 지식경제부 무역구제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통상협력총괄과장, 무역조사실장을 역임했다. 통상·무역 분야 전문가로, 우리나라 최초 무역 1조달러 달성에도 기여했다. 지난해 제17대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취임 후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에 기반해 디자인 전문기업 방문 등 현장과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통상·무역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망 디자인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