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52>과학기술처, 기술용역육성법 제정

1971년 10월 12일 과학기술처 중앙전자계산소에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중앙컴퓨터 가동을 기념하며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1년 10월 12일 과학기술처 중앙전자계산소에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중앙컴퓨터 가동을 기념하며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3년 2월 5일. 과학기술처는 국회를 통과한 기술용역육성법(현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을 이날 공포했다. 이 법은 국내 기술용역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자 신호탄이었다.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1972년 1월 14일 과학기술처를 초도 순시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법을 제정하겠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에 보고한 안건은 최우선 처리 과제였다. 하지만 이 법은 대통령 보고 후 1년이 지나서 제정했다. 이유는 관련 부처 간 이해가 엇갈려서 협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기술용역시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힘입어 매년 급성장했지만 외국 업체가 시장을 거의 독점했다. 매년 막대한 기술용역비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기술용역시장은 국내 업체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국에 비해 취약한 국내 기술용역 기술을 향상하려면 육성법 제정은 절실한 해결 과제였다. 과학자 출신의 최형섭 장관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형섭 장관의 회고록 증언. “당시 우리가 공장을 세우려면 그 비용의 15% 정도가 기술용역비로 그냥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공장을 외국 자본과 외국 기술자에 의존해서 건설할 경우 우리는 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후관리도 외국업체에 의존했다. 용역기술 자립을 하려면 먼저 기본설계부터 상세설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능력을 길러야 했다. 이를 위해 기술용역 육성법안을 만든 것이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당시 과학기술처 기술진흥국 사무관으로서 법안 작성 실무자이던 한기익 전 과학기술처 기술정책관의 술회. “당시 국내 용역시장은 외국업체가 다 차지했습니다. 국내에서 기술사를 양성해 놓고도 활용하지 못했어요. 외국 기술자가 설계하고 나중에 사후관리까지 그들이 담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시에 따르기만 했어요.”

과학기술처는 기술용역 등록제를 도입하고 국내 용역사업은 등록업자에만 발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을 마련해서 경제기획원·상공부·건설부·교통부 등 관련 부처, 관련 업계 등과의 협의를 시작했다. 한기익 전 국장의 증언. “부처 협의가 엄청 힘들었습니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경제 성장을 위해 최대한 외자 도입을 많이 해야 하는데 과학기술처가 외국 용역업체 참여를 제한하면 외자 도입에 차질이 있을까 우려했고, 재무부·건설부·상공부 등은 '왜 남의 업무에 과학기술처가 관여하느냐'며 반발했어요. 이런 상황이니 부처 간 협의가 순탄할 리 없었어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입법이 지지부진을 보이자 같은 해 8월 22일 성명을 발표하고 '기술용역 육성법 조속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처는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부처 간 협의 과정을 거쳐 1973년 1월 29일 법안을 국무회의 안건으로 제출했다. 국내 용역업체는 가문 날에 단비 만난 듯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과학기술처는 안건 제출 이유로 “이 법안은 국내 용역기술을 향상해서 외국 용역업자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해 용역비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 법안을 안건으로 제출하자 국무위원들조차 우려를 나타냈다. 국무회의에 앞서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최형섭 장관을 불렀다. “최 장관, 잠깐 나 좀 봅시다.” “무슨 일입니까?” 태 부총리는 국회의원과 부흥부·상공부·건설부 장관부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정·관·산을 두루 역임하고 당시 경제부총리를 맡고 있었다. “최 장관, 우리는 지금 해외에서 돈을 빌려야 경제가 돌아가는데 이 법을 만들어서 외국의 비위를 건드리면 그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할 텐데 어쩌려고 그럽니까.”

“부 총리님, 우리가 언제까지 남한테 돈을 빌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술 자립을 해야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면 기술용역육성법 제정은 절대 필요합니다.” 태 부총리는 최 장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기술처의 법안 내용이 알려지자 외국의 항의가 잇따랐다. 논란이 일자 과학기술처는 특별한 경우 외국 용역업자가 국내 용역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완했다.

과학기술처 고위관계자의 말. “당시 이 법안을 놓고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 논란 가운데서도 이 법을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 자립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해 다른 부처에서 계속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처는 국무회의를 거쳐 1973년 1월 29일 곧바로 국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정부 원안대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는 이 법안을 정부로 보냈고, 과학기술처는 2월 5일 법률 제2474호로 공포했다.

12조 부칙으로 제정한 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용역업을 하고자 하는 자는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등록해야 하며, 등록에 관한 기준과 절차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과학기술처 장관은 등록 기준에 적합한 자에 대해 등록증을 교부해야 한다. △국내에서 수행하는 용역은 이 법에 따라 등록한 용역업자에만 발주해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학술용역과 기타 특수한 용역은 제외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정부 투자 기업체가 발주하는 용역업무와 외국환관리법에 의한 용역업무 중 국내 용역업자가 수행할 수 없는 경우 용역발주업자는 과학기술처 장관의 승인을 얻어 외국 용역업자에 이를 맡길 수 있다. △외자도입법에 의해 도입할 용업업무 중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경제기획원 장관과 과학기술처 장관이 협의해서 외국 용역업자에 이를 수행토록 할 수 있다.

△정부는 국내 용역업자의 해외 진출을 적극 장려하기 위해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과학기술처는 법에 따라 용역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용역심의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과학기술처 장관은 이 법에 따라 등록한 용역업자가 등록 기준에 미달하거나 타인에게 등록증을 대여 또는 계약 체결 자격이 정지된 경우 용역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등록을 취소하거나 일정 기간 업무를 정지할 수 있다. △용역심의위원회는 과학기술처 차관이 위원장을 맡고 위원은 경제기획원, 내무부, 재무부, 법무부, 문교부, 농수산부, 상공부, 건설부, 교통부, 체신부, 경제 담당 무임소장관실 소속 2급 이상 공무원, 과학기술과 용역업무에 관한 경험 및 학식이 풍부한 사람 중에서 과학기술처 장관이 위촉한 사람 등 15인 이내로 구성한다. 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

정부는 같은 해 9월 7일 대통령령으로 기술용역육성법 시행령을 제정, 공포했다. 시행령에서 용역업 등록을 종합기술용역업·전문기술용역업·개인기술용역업으로 구분하고, 등록 분야 기술이나 분야에 한해 용역일을 하도록 했다. 이 조치로 기존 용역단체인 대한건설기술용역협회는 해산되고 1974년 6월 5일 사단법인 한국기술용역협회로 재출범했다. 협회는 같은 해 8월 6일 과학기술처 장관의 설립 허가를 받아 활동을 재개했다.

과학기술처는 1993년 5월 26일 법률 제4501호로 기술용역육성법을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으로 개정했다. 정부는 개정 이유로 “엔지니어링 활동에 대한 정부 규제를 최소화하고 대신 엔지니어링 기술 진흥을 위한 지원 시책을 확대하며, 관련 단체 설립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이에 한국기술용역협회는 명칭을 한국엔지니어링진흥협회로 변경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엔지니어링 활동 주체의 사업에 필요한 보증과 자금 융자 등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엔지니어링공제조합을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엔지니어링공제조합은 1993년 5월 특수법인으로 출범했다.

협회는 2010년 3월 한국엔지니어링협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그해 10월 엔지니어링의 날을 제정해 매년 엔지니어링산업 발전 유공자들을 포상하고 있다. 정부는 2010년 10월 19일 법률 10250호로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을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으로 개정했다. 주무 부처도 2008년 정부 조직 개편에 따라 과학기술처에서 지식경제부로 바뀌었다. 2013년 정부 조직 개편으로 주무 부처가 산업통상자원부로 변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