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전자 혈관' 국산 회로박 사라진다

롯데에너지 국내 유일 생산
전기료 폭등…수익성 악화
해외 이전·사업 철수 검토
소부장 생태계 '위축' 우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익산1공장 전경 (사진: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익산1공장 전경 (사진: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전기전자 제품의 혈관 역할을 하는 회로박(동박)이 국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유일하게 회로박을 만들어온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가 전기료 인상 등 비용 증가에 따른 수익성 악화로 사업 철수를 검토해서다. 반도체는 물론 스마트폰, 자동차까지 우리나라 주력 산업의 근간이 되는 핵심 소재를 해외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우려된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회로박 사업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북 익산 공장에서 생산하는 회로박을 해외로 이전할지, 아니면 생산을 중단하고 사업에서 완전 철수할 지 고심하고 있다.

이 사안에 정통한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말레이시아에서 만드는 이차전지용 동박으로 국내 회로박 사업 적자를 메웠는데, 이차전지 수요 둔화와 세계 경기 위축 등의 영향으로 이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며 “국내 사업 철수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로박은 거의 모든 전자 제품에 빠지지 않는 소재다.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사람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회로박을 유리섬유·알루미늄 기판·폴리이미드 필름 등과 합치면 인쇄회로기판(PCB)이 된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옛 덕산금속)는 1989년부터 익산에서 회로박을 생산해왔다. 과거 국내에는 여러 제조 업체가 있었지만 중국 저가 공세에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상대적으로 수익성 높은 이차전지용 동박으로 사업을 전환, 롯데가 국내 유일하게 남은 회로박 제조 업체였다. 또 다른 국내 회사인 솔루스첨단소재가 룩셈부르크에서 회로박을 만들었으나 지난 8월 공장을 중국에 매각, 철수했다.

국내 유일 제조 명맥을 이어온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가 회로박 사업 철수까지 고심하는 건 수익성이 악화돼서다. 회사는 지난해 644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회로박 적자는 물론 이를 상쇄하던 말레이시아 전지박 사업도 어려워져 적자폭이 커졌다. 올해는 적자 규모가 상반기에만 771억원으로 늘었다.

국내 사업장(익산공장)의 경우 최근 4년 새 72%까지 상승한 산업용 전기료가 부담을 줬다. 전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회로박 제조 특성상 전기료가 제조원가의 20~30%를 차지하는데, 전기료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회사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이다. 익산공장은 이미 2023년부터 연간 적자로 돌아서 그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게다가 새 정부에서 전기료 추가 인상 가능성이 제기되자 사업을 계속할지 말지 검토에 나서게 됐다.

완전 철수가 아닌 해외 이전의 경우 회로박을 수입해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국내 회로박 생산거점이 완전히 사라지면 공급망 위기에 노출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거의 모든 전기·전자제품에 빠지지 않는 핵심 소재다 보니 해외 수입에 의존하면 요소수 사태와 같은 혼란을 겪을 수 있고, 국내 기업의 해외 공장이라도 지정학적 위험에 취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강사윤 인하대 특임교수(전 한국마이크로전자및패키징학회장)는 “제조업의 근간은 소재·부품·장비”라며 “회로박의 국내 생산 기반이 없어진다면 가뜩이나 열악한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회로박 생산기업 개요
국내 회로박 생산기업 개요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