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인터뷰] '칩 워' 저자 “美 제재 없었으면 中이 韓 벌써 잡았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

“중국의 자급자족 전략은 명확합니다. YMTC(양쯔메모리)와 CXMT(창신메모리)로 한국 메모리를 대체하는 게 목표입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가 없었다면 중국이 한국을 이미 따라잡았을 것입니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가 중국을 한국 반도체의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 꼽았다. 단기 수익성과 무관하게 반도체를 국가 차원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어서다.

밀러 교수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가 중국의 추격 속도를 늦추며 한국에 시간을 벌어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구조적 우위가 아니라 유예 기간에 가깝다며, 기술 리더십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중국에 잠식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이 AI 모든 영역에서 경쟁력을 갖추려 노력하기보다, 이미 앞선 분야에서의 기술 장벽을 더 높여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전자신문은 반도체가 국제 패권 경쟁의 중심축으로 부상함에 따라 한국 반도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밀러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반도체를 둘러싼 국가들의 다툼을 조명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칩 워(반도체 전쟁: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을 위한 싸움)'를 쓴 저자다. 인터뷰는 지난 12월 서면으로 시작해 추가 질의응답을 하면서 진행됐다.



- 반도체가 산업을 넘어 국가 안보 쟁점이 됐다. 각국이 반도체를 쥐려는, 지정학적 '무기'가 된 배경은 무엇인가.

▲컴퓨팅 파워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경제적 권력과 외교적 영향력, 그리고 군사력까지 포함하는 모든 형태의 국가 권력의 핵심 원천이다. 이 인식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75년 동안 이미 컴퓨팅 능력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었다. 다만 오늘날에는 AI의 등장으로 이 연결고리가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해졌다.

-저술이나 인터뷰를 보면 컴퓨팅 파워가 곧 군사력이라고 정의했다. AI 역시 군사력과 직결돼 바꾸고 있는가.

▲AI는 이미 군사 시스템이 더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하도록 유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드론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이는 현대 전쟁에서 AI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AI의 군사적 활용은 전투 영역에만 국한되나.

▲그렇지 않다. 또 다른 핵심 영역은 정보(Intelligence) 분야다. 미국 군은 AI 활용 사례를 공개적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 그중 하나는 위성 사진을 분석해 사진 속 대상이 민간 차량인지 군사용 트럭 또는 탱크인지 구분하는 데 활용했다.

AI 인프라 핵심 노드를 누가 통제하느냐를 두고도 경쟁한다. 지정학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는 화웨이가 5G 통신 인프라에서 차지했던 위치나, 미국이 인터넷 인프라 전반에서 확보해 온 지위와 매우 유사하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가 이어지고 있다. 어떤 성과를 냈다고 평가하는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조 장비 판매 통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통제가 없었다면 중국은 대만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 기지 보유 국가가 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한국을 거의 따라잡았을 것이다. AI 모델 개발에서도 중국을 지연시켰다. 실제 딥시크는 지난해 12월 2일 최신 AI 모델을 내놓으면서 필요한 AI 칩에 충분히 접근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모델 성능이 원래 기술적으로 가능했을 수준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잠깐 언급했지만 대중국 반도체 규제가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가장 큰 수혜자는 아마도 한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아직 따라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네덜란드, 미국, 일본으로부터 최첨단 반도체 장비를 구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비 접근이 허용됐다면 세계 메모리 산업 경쟁 구도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미국 제재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보유한 중국 생산시설 투자 제약도 생겼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미국의 제재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자급자족 전략 추진이다. 중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을 대체하려는 명확한 계획을 갖고 자국 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유일한 질문은 그것이 얼마나 빨리 현실화되느냐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기업들의 대중국 전략이 재조정돼야 한다고 보는가.

▲기업들이 구매의향이 있는 고객에게 제품을 판매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시장 접근성이 얼마나 불안정해질지를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 석유화학, 조선, 스마트폰 등 다른 산업에서 한국 기업들이 겪었던 일이 이제 범용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현재 중국 반도체 기술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나.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 개발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상당한 기술적 진전을 이뤄냈다. 중국 영향력은 세계 레거시(구형) 반도체, 그리고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이미 체감되고 있다. 만약 중국이 대규모 물량을 쏟아낸다면 관련 시장의 왜곡을 심화시킬 수 있다. 한국, 미국, 일본, 유럽이 협력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반도체 자립' 노력은 지속된다고 예상하는가.

▲중국은 분명히 자급자족 생태계 구축을 시도하고 있으며,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외국산 투입 요소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반도체 생태계 구축이 목표다. 기존 글로벌 분업 구조와 근본적으로 방향이 다르다.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지정학적 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다. 다만, 반도체 기술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시간은 꽤 걸릴 것이다.

크리스 밀러 교수의 저서 '칩 워'
크리스 밀러 교수의 저서 '칩 워'

-그렇다면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완전히 독립된, 별도의 시장으로 분리되는가.

▲이미 반도체 후공정과 레거시 반도체 기술 영역에서는 중국의 생태계 분리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해당 분야에서 필요한 역량을 자국 내에서 대부분 확보했다. 반면 최첨단 반도체 분야에서는 여전히 해외에 장비, 소재, 노하우, 지식재산(IP) 등을 의존하고 있다. 이 영역에서도 기술 역량이 도달한다면 외국 기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으로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자국 우선주의'가 부상했다. 다른 국가들도 자립을 추구할 것으로 보는가.

▲그렇지 않다. 실제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완전한 자립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반도체 산업은 매우 국제화된 형태로 유지될 것이다. 미국 엔비디아가 대만 TSMC에서 칩을 생산하고 한국 삼성전자·SK하이닉스 메모리에 의존하는 구조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자국 내 제조를 강화하겠지만 동시에 대만, 한국, 일본, 유럽과 깊은 상호 의존 관계는 지속할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건 특정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공급망 회복력'이다. 훨씬 더 제한적이고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다.

-그럼에도 반도체 공급망은 기존 분업 기반의 효율성과 국가적 안보 사이에서 구조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해법은 선진 경제권 간의 협력이다. 미국, 유럽, 한국, 대만, 일본은 오랜 기간 서로 연결된 공급망과 협력의 역사를 쌓아왔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관세 이후에도 이러한 구조는 유지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중국에 대응하면서도 기업에 과도한 비용을 전가하지 않는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보 강화가 오히려 경제 성장 둔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새해 4월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최근 양국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일부 완화 조짐이 보인다. 미중 긴장은 완화될 것이라 보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는 완화되기 어렵다고 본다. 양국은 지정학적 투쟁에 깊이 얽혀 있다. 중국은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정치·군사 강국이 되기를 원한다. 대만 통제와 미국의 군사 동맹 체제 약화가 목표다.

반면 미국은 현재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한다. 양측 모두 AI와 반도체를 군사력과 지정학적 영향력의 핵심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이 경쟁은 단순한 산업 경쟁을 넘어선 전략적 대결이다.

-연장선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제기된다. TSMC가 중국의 통제에 놓일 것으로 우려한다. 과도한 상상일까.

▲일어날 가능성은 작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위험이다. TSMC 통제권이 중국 아래로 넘어간다면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글로벌 기업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미국이 공급망 다변화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는 산업을 넘어 정치·사회·국가 안보 쟁점이 됐다. 기업들은 이런 환경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기업들은 정치와 규제를 더 이상 외생 변수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자급자족 전략은 외국 기업을 대체하려는 장기 프로젝트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다른 국가들의 규제와 관세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구조적 흐름을 무시하는 기업은 장기적으로 큰 위험에 노출된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

-개별 기업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싶다.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지배력은 유지될까. 도전자들이 전 세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금까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한다. 경쟁사가 나타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구글을 비롯한 다른 기업들이 일정 부분 시장 점유율을 가져갈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엔비디아의 전반적인 우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테슬라도 엔비디아와 대결을 준비하는 것 같다. AI 칩을 설계하고 양산을 위해 TSMC, 삼성전자와 손잡았다. 나아가 자체 반도체 공장인 '테라팹'도 언급했다. 테슬라의 반도체 수직계열화는 가능한가.

▲이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테슬라는 분명히 매우 뛰어난 역량을 갖춘 기업이지만 반도체 제조는 극도로 어려운 사업이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우선해야 할 전략적 요소는 무엇인가.

▲결국 핵심은 기술적 리더십과 고객 신뢰다. 고객은 가장 앞선 기술을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파운드리를 선택한다. 두 가지 요소만이 고객 채택을 이끌어 사업 성공을 결정지을 수 있다.

-한국이 AI 시대 선두그룹에 속하려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한국은 가장 첨단 기술에 계속 집중해야 한다. 기술 발전 속도가 느려지는 분야에서는 중국이 가격 경쟁력으로 시장을 잠식할 것이다. 그러나 고대역폭메모리(HBM)처럼 한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가진 영역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적 성공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 경쟁력이 낮다는 평가도 있다. 관련 투자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메모리와 AI 반도체(시스템반도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AI 반도체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는 만큼 기업 간 경쟁 강도도 높다. 엔비디아, 구글 등 거대 기술기업들과 경쟁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확한 전문화가 필요하다.

기술적 차별화는 경쟁 우위를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기업들은 '기술적 해자'를 가진 독보적인 제품이 필요하다. 다른 기업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고유 기술 장벽이 존재해야만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유지된다.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자원 대다수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리스크 해소 방안은.

▲국제 협력이다. 한국은 미국, 유럽, 호주, 인도 등과 협력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모두 소재와 광물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현재는 광물과 소재 분야의 병목 지점을 줄여야 한다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널리 확산돼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는 'AI 글로벌 3강' 도약을 목표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전문가로서 이에 조언한다면.

▲어느 한 국가도 AI와 관련된 모든 기술 영역을 혼자서 주도할 수는 없다. 각 국가는 자신들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 집중해 전문화해야 한다. 또 AI를 자국 경제 전반에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AI의 가치 중 상당 부분은 칩 제조업체와 같은 AI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아니라, AI를 다른 경제 영역에 적용하는 기업들에 귀속될 것이다.


○크리스 밀러는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이자 미국 싱크탱크인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연구소(AEI)의 비상주 선임 연구원이다. 미국 컨설팅회사 그린맨틀에서 기술, 지정학, 거시 경제 트렌드에 대한 자문도 맡고 있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학사, 예일대에서 역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22년 출간한 '칩 워'를 통해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성을 조명하며 주목받았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왼쪽 첫번째)가 2024 세계 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례총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왼쪽 첫번째)가 2024 세계 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례총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