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사는 처절한 자기 파괴와 혁신의 기록이다.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실존적 위기 앞에서 우리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미래를 향한 선제적 결단이었든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든, 그 고통을 감내한 결과 오늘날의 글로벌 초일류 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의 컨트롤타워라 자부하는 '정부'는 과연 그 속도에 발맞춰 진화해 왔을까?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수직적·계층적 행정 체계가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디지털 경제에서도 여전히 유효할까?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부는 21세기의 초고속도로를 20세기의 낡은 엔진으로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시절, 오픈AI의 샘 올트먼을 초청했을 때 목격한 관가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당시 대통령실을 포함한 관가 곳곳에서는 미묘한 혼란이 감지됐다. AI 혁신의 상징을 초대해 놓고도, 부처간 '소관주의'라는 보이지 않던 칸막이가 드러난 것이다. 과거 정보통신기술(ICT)이 특정 부처의 고유 업무였던 시절에는 이런 혼란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디지털은 모든 산업의 기저를 흐르는 '혈류'이자 기반이다. 이 경계 파괴의 시대에 여전히 소관을 따지는 관행은 국가 경쟁력의 골든타임을 갉아먹는 걸림돌이다. 정부 조직의 역할 재정의를 포함해 근본적인 조직개편이 필요한 시점이다.
거버넌스의 실패는 정책 현장에서도 볼 수 있다. 가정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철수는 보건복지부 시설로 향했다. 이후 성인이 되어 퇴소 시 '자립준비청년'이 되어 정착금과 수당을 받지만, 자리가 없어 여성가족부 쉼터로 배정된 영이는 정착금도 정기적 지원도 없이 홀로 자립의 파고를 마주하게 된다. 어느 부처가 관리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자립에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은 행정의 실패이자 국가 시스템의 직무유기다. 이제는 보호 이력이 아닌 '필요도'에 따라 모든 위기 청년이 동등한 지원을 받는 '자립지원 통합법'으로 이 잔인한 사각지대를 메워야 한다.
변화의 칼날은 입법부도 비껴갈 수 없다. 1988년 국정감사가 부활한 이래 국회의 일하는 방식은 30년 넘게 큰 변화가 없었다. 의원 1인당 9명의 보좌진 체제는 업무 고도화의 산물이었으나, 이제는 단순한 인력의 규모가 아니라 '역량의 디지털 전환'을 고민해야 할 때다. 생성형 AI가 보편화되는 2030년 국회는 단순히 법안을 발의하는 곳을 넘어 '지능형 정책 시뮬레이션 센터'가 되어야 한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해 법안 통과 시의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을 실시간으로 도출하면, 보좌진은 AI가 생성한 결과 데이터를 해석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고도화된 정책 설계자'로 진화해야 한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벤트성 국정감사 대신, 정부 정책의 효율성을 AI가 24시간 실시간 모니터링한 후 입법부에 공유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상시 과학 입법'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치고 나누는 물리적 조정이 아니다. 부처의 장벽 뒤에 숨은 '소관 중심'의 행정과 국회의 '아날로그 입법'을, 데이터와 현장이 즉각 결합하는 '문제 해결 중심'의 애자일(Agile) 거버넌스로 전환하는 것이다. 영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민생 복지도, 샘 올트먼과 같은 혁신가를 맞이하는 미래 산업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국회의 지능형 입법도 결국 '국민의 필요'와 '국가적 과제'를 중심으로 작동해야 한다.
거버넌스의 리빌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칸막이를 허물고 데이터와 지능으로 무장한 '넥스트 거버넌스'를 향한 사회적 공론화를 시작하자.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갈구하는 '시스템 정치'의 본질이자 미래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