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과 인공지능(AI)으로의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재, 정부는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제도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 규율, 플랫폼 질서, 데이터 활용, 디지털 안전과 관련한 논의도 활발하다. 다만 정작 그 디지털·AI 생태계가 꽃필 수 있도록 토대를 제공해 온 가장 기본적인 정보통신기술(ICT) 법체계는 여전히 과거의 논리와 구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방송법, 전기통신사업법, 전파법이 바로 그것이다.
현행 방송법은 2000년 지상파와 유료방송을 통합해 지금의 골격을 갖췄다. 당시에는 분산된 방송 관련 법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위성방송의 근거를 마련하며, 방송의 자유·독립·공공성과 시청자 권익을 함께 담아내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그 시점에서는 충분히 시대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기본 구조는 여전히 지상파, 케이블, 위성 등 전송수단과 사업유형 중심의 체계 위에 서있다. 시장은 이미 인터넷 기반 영상서비스로 이동했지만, 법은 여전히 전통적 방송질서의 연장선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지금 영상콘텐츠 유통의 주류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다. 이용자는 더 이상 '방송'과 '통신'을 구분된 서비스로 경험하지 않는다. 동일한 모바일 단말에서, 같은 계정으로, 동종 네트워크 위에서 실시간 채널, 주문형 콘텐츠, 숏폼을 소비한다. 유럽연합(EU)이 AVMSD(Audiovisual Media Services Directive) 체계를 통해 전통적 TV 방송과 주문형 서비스를 함께 포괄하고, 2018년 개정으로 비디오공유플랫폼 관련 규율까지 확장한 것은 이런 현실을 제도적으로 반영한 결과다. 우리도 이제는 방송법을 전통적 방송사업 보호의 틀이 아니라, 시청각미디어서비스 전반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전기통신사업법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현행 체계는 1991년 전부개정을 통해 마련됐고, 이후 시장 개방과 경쟁 촉진, 이용자 보호 필요에 따라 여러 차례 보완돼 왔다. 그러나 법의 기본 골격은 여전히 전기통신회선설비를 중심으로 한 기간통신역무와, 그 설비를 이용하는 부가통신역무라는 구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음성과 데이터 전달이 통신의 중심이던 시절에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오늘의 통신은 더 이상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다. 네트워크는 클라우드와 결합하고, 서비스는 소프트웨어화되며, 이용자는 망사업자·플랫폼사업자·콘텐츠사업자·단말사업자가 함께 만드는 통합적 경험을 소비한다. 그럼에도 법은 여전히 설비 기반 사업 분류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제 통신법제는 전기통신회선설비 유무와 그를 제공하는 질서 위주의 관리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지상망과 위성통신, 산업용 특화망, 사물인터넷, 초저지연 서비스, 클라우드 기반 통신환경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용자 보호도 과거처럼 약관과 요금 규율에 머물 것이 아니라, 서비스 안정성, 트래픽 관리의 투명성, 인증과 번호의 신뢰, 재난 시 복원력, 망과 플랫폼 간 공정한 관계까지 담아내야 한다. 통신을 '설비'의 문제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디지털 연결성과 국가 경쟁력의 기반으로 다시 정의할 것인지가 지금의 핵심 질문이다.

전파법은 더 오래된 법이다. 그 모태인 전파관리법은 1961년에 제정됐고, 1991년 개정을 거쳐 1992년부터 전파법이라는 명칭 아래 운영됐다.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기본 감각은 여전히 할당, 지정, 사용승인, 허가 등 전파 관리 중심에 놓여 있다. 물론 혼신 방지와 효율적 배분, 질서 있는 이용 관리는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의 전파는 더 이상 단순한 관리 대상이 아니다. 저궤도 위성, 지상망-위성망 융합, 동적 스펙트럼 공유, 산업용 무선망, 우주산업과 국방, 재난 대응까지 고려하면 전파는 국가 전략자산 그 자체다. 그럼에도 법체계가 여전히 관리행정 위주에 머문다면, 전파를 성장과 혁신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데 구조적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법들이 각각 오래됐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세 법이 모두 과거의 산업 구획과 기술 분류를 전제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방송은 지상파와 케이블 중심, 통신은 음성과 데이터 중심의 설비기반 역무 구분, 전파는 할당과 허가 중심의 관리 체계라는 기본 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이미 이 경계를 넘어섰다. 콘텐츠는 네트워크와 플랫폼을 넘나들고, 통신은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로 재편되며, 전파는 산업정책과 안보정책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법과 현실의 간극이 이제는 부분 개정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미세조정이 아니라 전면개정이다. 방송법은 전송수단 중심 체계에서 벗어나 기능과 책임 중심의 수평적 규율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전기통신사업법은 설비기반 사업분류의 한계를 넘어, 연결성·신뢰성·공정성 중심의 법체계로 재구성돼야 한다. 전파법은 단순한 관리법을 넘어, 국가 전파전략과 산업 활용, 안보와 혁신을 함께 담는 전략법으로 진화해야 한다. 세 법은 따로 손보더라도 결국 하나의 큰 설계도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방송·통신·전파를 분절된 영역으로 보는 사고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 법제는 또다시 현실을 뒤쫓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AI 시대를 말하면서 그 AI의 기반이 되는 연결·네트워크·전파의 기본법을 과거 틀에 묶어두는 것은 법제의 불균형이다. 낡은 기초에서 화려한 미래 담론을 논의하는 것이다. 이제는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방송은 더 이상 지상파와 케이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통신은 더 이상 음성과 데이터 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전파는 더 이상 허가와 관리만의 대상이 아니다. 시장과 기술이 이미 먼저 바뀌었다면, 법도 이제는 그 변화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완비돼야 한다. 방송법, 전기통신사업법, 전파법의 전면개정은 선택이 아니라 AI와 디지털 시대의 기본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필수 과제인 것이다.
권오상 디지털미래연구소 대표
〈필자〉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재무관리)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American University Washington College of Law에서 LL.M., 연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체류 중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에서 Legal Intern으로 근무했으며, 정보통신정책연구원과 공공기관에서 ICT 정책과 사업 전반을 폭넓게 경험했다. 미디어미래연구소 소장을 거쳐 현재 디지털미래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디지털·인공지능·모빌리티 등 미래 의제와 방송·통신·미디어·ICT 분야의 정부 정책 및 기업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