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반도체마저 정치 족쇄 채울 순 없다

붉은 말의 해 병오년(丙午年), 거침없는 도약과 활력을 상징하는 기운 속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경기도 용인시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 1기 팹 건설 현장에 붉은 기운을 머금은 태양이 수십 대의 대형 크레인 너머로 떠오르고 있다.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AI 핵심 반도체를 생산할 이곳은 한국형 AI 경쟁력의 전진기지로, 대한민국이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용인=이동근기자 foto@etnews.com
붉은 말의 해 병오년(丙午年), 거침없는 도약과 활력을 상징하는 기운 속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경기도 용인시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 1기 팹 건설 현장에 붉은 기운을 머금은 태양이 수십 대의 대형 크레인 너머로 떠오르고 있다.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AI 핵심 반도체를 생산할 이곳은 한국형 AI 경쟁력의 전진기지로, 대한민국이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용인=이동근기자 foto@etnews.com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주재한다. 이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클러스터 추가 투자 계획도 발표될 전망이다. '지역 우선' 기조가 부상하며 민선 9기 지자체 당선인들의 유치전도 정점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유력한 가운데에도 전국 대다수 지자체가 러브콜을 멈추지 않고 있다. '평당 1000원 산업용지 분양'을 내건 곳도 나타났다. 바야흐로 '반도체의 계절'이다.

지방소멸 위기 속 첨단산업 유치를 위한 명분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명분을 정치적 논리가 집어삼킬 때 어떤 참극이 벌어졌는지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구상했던 '행정수도'가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과 정치적 타협에 부딪혀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전락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 연장선에서 충청권 표심과 지역 안배가 얽혀 기형적으로 결정된 KTX 오송역은 호남고속철도의 직선성과 효율성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 대가로 세종과 서울을 오가는 수많은 정부부처 공직자와 기업인들은 지금도 길바닥에 소중한 시간을 내다 버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치켜세웠던 '광주형 일자리(GGM)'의 씁쓸한 현주소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적 성과에 밀려 출범한 GGM은 심각한 파행 끝에, 최근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당선인의 중재로 211일 만에야 천막농성을 풀었다. 기업 자생력이 아닌 또 다른 '정치적 중재'에 기대어 파국을 막는 불안한 상생 모델의 한계다. 하반기 본격화될 공공기관 2차 이전 역시 산업 생태계보다 소위 '힘 있는 정치인'들의 입김에 휘둘린다면 제2의 오송역 사태를 피할 수 없다.

지역균형발전의 성패는 정치인의 의욕이 아닌 '기업 생태계'와 '지역 수용성'에 달렸다. 2019년 부지 선정 후 경기 여주시와의 용수 갈등, 안성시의 송전선로 민원 등 인근 지자체의 몽니로 6년이나 허송세월하다 지난해 2월 겨우 첫 삽을 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뼈아픈 교훈이다. 대기업 투자를 유치하고도 지자체 갈등 탓에 글로벌 속도전에서 치명적인 시간을 낭비했다.

다행인 점은 정부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산업통상부가 지난 25일 입법예고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은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수적인 전력과 용수 등 산업기반시설을 국가가 총사업비의 50%에서 최대 100%까지 책임을 지고 우선 반영하도록 못 박았다. 인프라의 물리적 구축과 재원 리스크는 정부가 법적으로 직접 짊어지겠다고 총대를 멘 셈이다.

정부가 판을 깔아준 만큼, 이제 공은 정치권과 지역사회로 넘어왔다. 경북 구미시가 반도체 팹 유치를 위해 산업 용지를 '평당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공급하겠다고 선언한 점은 지자체들이 반도체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식시장 투자자들이나 외국인, 글로벌 AI 기업들 못지않게 지자체와 정부도 반도체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기피 시설로 낙인 찍혔던 신규 원전 부지 공모에 복수의 지자체와 주민들이 파격적인 혜택을 내걸며 자발적으로 유치 경쟁에 나선 사례도 본질은 같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은 단 하루의 지연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속도전이다. 지역균형발전이 정치적 안배라는 이전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간담회가 정치적 안배나 생색내기용 전리품 분배의 장이 아니길 바란다. '기업이 원하는 곳'과 '준비된 지자체'가 결합하는 진짜 지역균형발전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