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도 팩스를 쓰나요?” 30년 넘게 전자팩스 사업을 해오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그러나 병원 진료의뢰서, 금융 계약서, 관공서 민원서류는 지금도 하루 수백만장이 팩스로 오간다. 팩스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비정형 문서 인프라로 산업 현장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문제는 그 문서가 '이미지파일'라는 점이다. 웹팩스로 종이발생은 없앴지만, 수신함에 쌓인 이미지파일은 여전히 사람이 눈으로 읽고 분류하고 입력해야 했다. 디지털화는 됐지만 데이터화는 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고객 애로사항을 반영해 전자팩스로 받은 이미지파일을 비정형 이미지 인식 기술을 활용해 손쉽게 데이터로 전환하는 것으로 업그레이드했고, 최근에는 인공지능(AI)기술과 결합해 기울어진 스캔본의 자동 교정, 손글씨 메모, 도장이미지까지 데이터 전환까지 용이해진 상태다. 부가적으로 개인정보 필터링 및 문서 위·변조 우려까지 해소하고 있다.
최근의 추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에이전트팩스'로 진화되고 있다. 만약 영어로 된 팩스가 도착하면 에이전트 팩스는 수신 즉시 한국어 번역은 물론 몇 줄로 문서를 요약해준다. 더군다나 문서상에 주민번호나 사업자번호등 개인정보성 내용이 있을 때는 '마스킹' 기능을 통해 자동으로 크리티컬한 내용을 마스킹 해주는 지능형 문서형태를 만들어준다. 즉, 문서를 읽는 수준을 넘어, AI 에이전트가 수신 문서의 내용을 이해해 담당 부서로 배정하고 업무시스템에 등록하며 회신까지 준비한다. 30년 된 레거시 문서송수신 인프라가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일하는 업무 동료로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전환(AX)의 성패는 최첨단 모델이 아니라, 현장의 아날로그 수요와 데이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경험 특화 기술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화려한 데모가 아니라 30년간 축적한 현장 문서 데이터와 도메인 지식이 AI를 진짜 쓸모 있게 만들었다.
팩스 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 데이터의 80% 이상이 계약서, 전표, 민원서류 같은 비정형 문서다. 이 문서들이 데이터로 바뀌지 않으면 그 위에 어떤 AI를 얹어도 모래성이다. 제조 현장의 작업지시서, 물류의 운송장, 의료기관의 기록지 등 산업마다 팩스를 닮은 레거시 문서가 산적해 있다. 여전히 작업현장에서는 텍스트를 직업 손으로 작성해서 보관하는 형태의 아날로그 원시문서가 AI시대에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문서의 디지털화를 넘어 AX로 전환되는 것을 중소·중견기업이 홀로 감당하기는 버겁다. 이제 정부가 비정형 문서의 AX에 힘을 보탤 때다. AI 바우처 사업 확대, 비정형 문서 데이터 표준화, 공공부문의 선도 도입, 산업별 실증 지원, 특히 데이터 정제와 학습에 드는 초기 비용 부담을 낮추는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레거시를 안고 있는 수많은 기업이 훨씬 빨리 AI 시대로 건너올 수 있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는 전통적 레거시 팩스가 AX로 글로벌 수출 효자 역할을 하듯, 기술의 가치는 새로움이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푸는 데 있다. 가장 오래된 문서가 가장 먼저 AI 에이전트로 다시 태어난 우리의 경험이, 한국 산업 전반의 AX를 앞당기는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한준섭 지미션 대표 jshan@gmiss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