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5000억원 규모 투자계획을 마련해 야심차게 추진해온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연구개발(R&D) 작업이 난항에 빠졌다고 한다. 해당 개발과 수요를 사실상 책임질 국내 대기업을 '앵커기업'으로 확보하지 못하면서다.
당초 상반기 안에 내놓기로 한 '차세대 전력반도체 상용화 기술 로드맵'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수요기업 연계형 과제 공모도 기획과 예산 협의 단계에서 멈춰섰다. 국산화 기술 자립률이 10% 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핵심 산업 공급망을 안정화하겠다는 정책 취지는 무색해지고, 산업 현장의 병목 현상만 심화되는 어정쩡한 모양새다.
사실 이 R&D는 예산 배정부터 지연이 어느 정도 예견됐다. 현재 반도체 업계와 정부 모두가 인공지능(AI) 특수 대응과 메모리 공급량 확대, 선단 공정 주도권 다툼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마진율이 낮고 사업성이 떨어지는 SiC R&D에 5000억원이나 예산을 배치한 것 자체가 실제 글로벌 반도체 비즈니스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투자 수익률이 높은 메모리와 첨단 패키징에 인력과 자원을 배치하기도 버거운 대기업 입장에서, 외국산 전문 제품을 수입해서 쓰는 것이 전력반도체 산업에 훨씬 효율적이란 분석이다. 굳이 불요불급한 자원을 쏟아부을 이유도 희박하단 것이다.
물론 차세대 전력반도체 자체 기술력을 끌어올리고, 전기차·데이터센터 등 미래 산업의 공급망 안정화 루트를 우리 산업계 스스로 확보하려는 노력은 가치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 역시 어디까지나 미래 전략적 필요성과 수익성이라는 시장 메커니즘과 따로 떼어놓고 결정할 일은 아니다. 당위성만 앞세워 기업에 손실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시장의 생리를 무시한 접근이다.
백번 양보해 정부가 당장의 시장 현실과 다소 부합하지 않더라도 국가 전략 차원에서 R&D를 기획·추진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러한 R&D 결과물이 최종 수요 대기업과 연계되어 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효용성이 보장될 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정부는 이제 민간에만 앵커기업 참여 설득을 떠넘기지 말고 직접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아야 한다. 꼭 필요한 연구개발 결과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할 대기업에 과감하고 혁신적인 세제 지원과 파격적이고 실질적인 혜택 가이드라인을 내놓아야 한다.
당위론적 상황 논리에만 빠져있지 말고, 과감한 참여기업 지원책을 내놓는 것이 멈춰 선 차세대 전력반도체 로드맵을 다시 돌릴 현실적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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