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대한민국에 국민건강보험이 처음 도입되자 병원 원무과에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환자의 진료비를 정확히 계산하고 청구해야만 했다. 이에 1978년 일부 병원이 진료비 계산과 보험 청구를 위한 원무 전산 시스템을 개발했고 이듬해 서울대병원이 신축 건물에 전산실을 열었다. 대한민국 의료정보화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시스템이 다룬 핵심은 환자의 '진료'가 아니라 병원의 '비용'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렀다. 의료정보시스템의 역사는 곧 '시스템이 무엇을 다루게 되었는가'의 진화 과정과 같다. 병원정보시스템(HIS)의 세대 구분은 전문 기관마다 조금씩 다르고 정답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음의 세대 구분을 본고의 관점으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다만 어떤 구분을 택하든 분명한 것이 있다. 지금 벌어지는 변화는 단순히 기능이 하나 추가되는 종류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1세대는 '지시'를 다뤘다. 1994년 국내 최초로 처방전달시스템(OCS)이 도입되면서 의사의 처방 지시가 종이 대신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후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 검사실정보시스템(LIS)이 통합되며 현대적인 병원정보시스템의 골격이 갖춰졌다.
2세대는 '기록'을 다뤘다. 2003년 의료법 개정으로 의무기록을 종이가 아닌 전자문서로 작성하고 저장하는 것이 법적 근거를 얻으면서 병원에서 무거운 종이 차트와 필름이 사라지는 완전한 디지털화가 본격화됐다.
3세대는 '연결'에 주목했다. 2010년대 모바일 환경과 방대한 데이터의 시대가 열리며 병원 안의 모든 정보가 연결됐다. OECD는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보유한 국가'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성취는 절반에 그쳤다. 표준화 미비로 인해 데이터가 병원 밖을 나서지 못하는 이른바 '정보의 섬' 현상이라는 명확한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4세대, 의료 정보기술(IT)은 시스템의 '전달 방식' 자체를 혁신하기 시작했다. 바로 '클라우드'의 도입이다. 병원 내부에 무거운 서버를 구축하고 몇 년마다 교체하던 과거의 모델에서 최신 기술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구독형 서비스(SaaS)' 모델이 상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클라우드 HIS가 업계의 절대적인 주류라고 할 수는 없으나, 주목할 점은 국내를 대표하는 HIS 선도 기업들을 중심으로 상용 클라우드 기반의 병원정보시스템을 안정화시키고 그 저변을 점진적으로 확산해 나가는 수준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본격적인 클라우드 전환을 위한 기초가 다져지고 있으며, 이는 병원정보시스템이 유지 보수되고 업그레이드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시스템이 '판단'을 다루는 5세대의 문턱에 서 있다.
4세대까지의 시스템은 사람이 입력하고 기계가 저장하는 수동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5세대는 설계 단계부터 병원 워크플로 전반에 인공지능(AI)이 깊숙이 내재화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방대한 기록 요약과 진료 방향 제안 등 임상 지원 외에도 사용자의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고 환자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기대된다. 업무 주체가 사람에서 기계로 확장되는 첫 세대다. 아직 학계나 업계에서 완전히 확정된 개념은 아니지만, 일각에서는 워크플로 전반에 AI가 심어진 이러한 진화를 가리켜 'AI 네이티브 의료정보시스템(AI Native EHR)'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최근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맞물려 의료 AI가 가져올 혁신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병의원 정보시스템 보급률을 자랑하며, 국가 차원의 건강정보 고속도로까지 개통한 인프라 강국이다.
하지만 화려한 보급률 이면에는 '국가 표준 적용 전송률 20% 안팎'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존재한다. 시스템은 각자 돌아가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AI 혁신의 본질적인 전제 조건은 결국 '연결된 데이터'다. 데이터가 끊김없이 흐르고 연결되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AI 혁신은 결코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의료계와 IT업계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어떤 AI 솔루션을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다. 클라우드와 AI가 결합된 미래의 의료정보시스템은 과연 어떤 뼈대 위에서 움직여야 하는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이기혁 분당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과장·이지케어텍 사업총괄 겸임 strategy@ezcarete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