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업 IP 공시, 주주·투자자 관점에서 설계돼야](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6/10/20/news-p.v1.20261020.4f8a9df19a4f483e9aa2442eae364016_P3.jpg)
지난 9월 지식재산처가 '지식재산(IP) 정보공개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정부가 기업 IP 정보 공시를 위한 작성 지침을 직접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기업가치 상당 부분이 기술과 브랜드, 데이터 같은 무형자산에서 나오는데도 우리 공시는 여전히 공장과 토지, 설비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반가워야 할 소식이다.
그러나 IP·무형자산 공시제 도입을 주장해 온 입장에서 가이드라인을 읽고 나니 걱정이 앞선다. 무엇을 반드시 공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 기준도, 공시 내용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장치도 빠져 있어서다. 자율공시로 시작하는 것까지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기준도 검증도 없는 자율공시가 문제다. 이대로라면 공시제 도입 근거를 쌓기는커녕 오히려 허물 수 있다.
첫째, 최소한의 공통 기준이 없다. 가이드라인은 공시 정보를 기본정보, 가치연계정보, 전략정보로 나눈다. 그러면서 이 구조는 “반드시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하는 요건이 아니라” 기업이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참고 틀”이라고 못박는다. IP 정보는 “모든 기업이 동일하게 제공하는 정보라기보다” 기업이 중요하다고 판단할 때 “선택적으로 제시하는 정보”라고도 한다. 가치연계정보는 정확한 수치를 밝히기 어려우면 '전체 매출의 과반 이상' 같은 범위 표현을 쓰거나 항목을 생략해도 된다고 안내한다. 가장 기초적인 특허 보유 건수조차 집계가 어려우면 '다수 보유 중'이라고 써도 무방하다고 한다. 업종별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투자자가 기업을 비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 항목까지 선택사항으로 두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업마다 고른 항목과 표현이 다르면 투자자는 비교할 수 없고, 좋은 정보만 골라내 놓는 선택적 공시도 막을 수 없다.
둘째, 투자자 보호 관점이 약하다. 공시제도는 본래 기업이 알리고 싶은 것보다 투자자가 알아야 할 것을 알리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가이드라인은 IP 공시 목적을 '투자 유치·기업가치 제고·신뢰 구축을 위한 객관적 정보 제공'으로 정의하고, 첫 번째 효과로 '투자 유치 및 자금조달 강화'를 꼽는다. '바로 쓸 수 있는 문구 예시'라는 이름으로 실린 문장도 대부분 빈칸 채우기식이다. '당사는 '기술·제품 분야'에서 축적한 독자적인 특허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식이다. 소송 중인 기업에는 '당사 사업 운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작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라는 예시 문장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특허 분쟁이나 만료 같은 위험정보는 선택 항목에 들어 있을 뿐, 반드시 공개하라는 원칙은 없다. 부록 자가진단표는 영업비밀 보호를 위한 점검 항목을 따로 네 개나 두고 '소송 중인 IP의 구체적 내용이 과도하게 공개되지 않았는가'를 묻는다. 리스크라는 말은 '연결 논리'를 묻는 항목에 한 번 나올 뿐이고, 불리한 정보를 빠뜨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항목은 없다. “혁신 기술 보유” “핵심 특허 다수 확보”라는 발표만 믿고 투자했다가 손실을 떠안는 소액주주의 피해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이대로라면 홍보성 공시만 늘어날 우려가 크다.
셋째, 신뢰성을 확보할 장치가 없다. 가이드라인은 제목에서는 '정보공개'를, 본문에서는 'IP 공시'를 쓴다. 투자자에게 책임지고 알리는 공시인지, 기업이 알아서 내놓는 정보 제공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이 문서의 부제는 '기업 담당자 실무 작성 매뉴얼'이다. 공시 채널로 사업보고서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들고 있지만, 금융위원회나 한국거래소 공시 규정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다. 지침을 따르지 않거나 부실하게 작성해도 이 지침만으로는 아무런 제재가 없다. 내용의 근거를 확인할 체계도 없이 기업이 스스로 점검하는 자가진단표가 전부다. 표지에서 약속한 '국내외 우수 사례'도 실제로는 일본과 싱가포르 기업 사례뿐이고, 국내 기업 공시 사례는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일본은 다른 길을 걸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2021년 기업지배구조 코드에 IP 투자 정보 공시와 이사회 감독 책임을 담았다. 올해 7월 개정에서는 IP 등 무형자산 투자를 성장 투자로 원칙 본문에 명시했다. 정부도 경영 실천 지침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일본 특허청은 조사연구 일환으로 공시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전문가팀을 보내 공시 개선을 함께 진행했다. 팀은 운용사 출신 투자자와 IP·공시 전문가로 꾸렸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요구한 것은 특허 건수보다 IP가 어떻게 수익과 성장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거래소 규율 위에 정부 지원을 얹은 구조다. 최소 기준도 검증 장치도 없는 우리 가이드라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기준으로는 제도 시행에 꼭 필요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기도 어렵다. 특히 금융당국이 그렇다. 금융당국은 아직 IP 공시에 적극적이지 않다. 공시 규정에 새 항목을 넣으려면 그 정보가 투자 판단에 중요한지, 허위나 누락을 어떻게 가려낼지부터 따진다. 최소 기준도 검증 방법도 없는 지침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IP 정보는 표준화하기 어렵다” “기업 자율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신중론에 근거를 보태 금융당국을 더 소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 IP 공시의 기반을 닦으려 애써 온 지식재산처로서는 자신이 내놓은 지침이 오히려 제도화 문턱을 높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상장기업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 불분명한 채 작성 부담만 늘고, 잘 써도 시장에서 차별화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투자자 역시 기업이 골라 쓴 홍보성 문장에서 쓸모를 찾기 어렵다. 당국과 기업, 투자자 누구도 설득하기 어려운 지침이 되기 쉽다.
그래서 어설프게 있는 기준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할 수 있다. 기준이 없으면 투자자는 적어도 경계한다. 하지만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른 'IP 공시'라는 이름이 붙으면 검증되지 않은 홍보성 문장도 공신력 있는 정보처럼 읽힌다. 처음 만들어진 기준은 이후 논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낮은 기준이 먼저 자리 잡으면 그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할 때마다 “이미 가이드라인이 있다” “기업 부담이 늘어난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부실한 공시가 쌓여 효과가 없다는 인식이 퍼지면 “해 봤지만 쓸모가 없었다”는 말과 함께 제도화 논의 자체가 닫힐 수도 있다.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시작하는 편이 낫다.
우리 협의회는 새 법을 만들기보다, 이미 작동하는 공시 제도에 IP 항목을 단계적으로 반영하는 방안을 제안해 왔다. 가장 먼저 추진할 수 있는 것은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공시다. 올해는 한시적으로 약식공시가 허용됐지만, 내년부터는 현황 진단부터 이행 현황까지 모든 항목을 갖춘 공시가 요구된다. 한국거래소가 앞으로 가이드라인을 손질할 때 IP·무형자산 현황과 투자 계획 항목을 넣고, 공시하지 않는 기업은 그 사유를 설명하게 하는 '준수 또는 설명' 방식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법 개정 없이 거래소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가능하다. 밸류업 공시는 고배당 기업의 배당소득 분리과세 요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는지를 요건에 반영하는 방안도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만하다.
두 번째 경로는 기업지배구조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올해부터 코스피 상장사 전체가 제출하고 있다. 보고서 작성 지침과 한국ESG기준원 ESG 모범규준에 IP·무형자산 전략과 이사회 감독 현황을 담자는 것이다. 그러면 IP를 일본처럼 이사회가 감독하는 경영자원 배분의 문제로 다루게 된다. 이와 별도로 기관투자자 행동 원칙인 스튜어드십 코드에 투자 대상 기업 IP 정보를 요구하는 원칙을 담으면, 국민연금 같은 대형 투자자 요구를 통해 공시가 퍼져 나갈 수 있다.
어느 경로든 앞서 지적한 세 가지 빈틈부터 메워야 한다. 모든 기업에 공통으로 적용할 최소 지표를 정하고, 특허 만료나 분쟁 같은 위험정보는 반드시 담게 하며, 사실 확인할 수 있는 정보부터 제3자 검증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런 기준은 지식재산처가 금융위원회, 한국거래소와 함께 만들어야 실효성이 생긴다.
IP·무형자산 공시는 투자자 보호 장치이면서 금융투자시장을 살리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으로는 지배구조와 함께 기업 정보의 불투명성이 늘 꼽혀 왔다. 기술기업 실력을 근거와 숫자로 확인할 수 있으면 외국인 투자자는 테마보다 펀더멘털을, 개인투자자는 소문보다 공시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기술력 있는 기업은 제값을 받고, 주장만 하는 기업은 걸러진다. 장기 투자 자금이 머무는 시장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 글은 누구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처음 가는 길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든 연구진과 담당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마주했을 유무형의 여러 제약을 바깥에서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으리라 믿는다. 다만 처음 만들어진 기준이 앞으로의 제도를 좌우하는 만큼, 더 실효성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뜻에서 이러한 제언을 한다.
정부가 IP 공시 첫발을 뗀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이제 그 첫걸음이 시장의 신뢰로 이어져야 한다. 기업 영업비밀은 보호하되, 주주와 투자자가 기술 경쟁력과 사업 위험을 비교·판단할 수 있는 정보만큼은 반드시 공개되도록 가이드라인을 보완해야 한다. 최소 기준과 검증 장치를 갖춘 가이드라인이라면 금융당국을 설득할 든든한 근거가 된다. 그래야 지식재산처도, 시장도 금융당국에 IP·무형자산 공시제도 도입을 더 힘 있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병희 한국지식재산서비스협회 기업 IP·무형자산 공시지원기관 협의회장, 누리드림 대표 nuridream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