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 '호황' 속 재계 인사, 불황의 청구서까지 내다봐야

김시소 기자
김시소 기자

연말 재계 인사 시계가 빨라졌다. 한화와 HD현대 등 일부 회사는 이달 초 정기 인사를 마쳤다. SK는 이르면 이달 말, 삼성과 LG는 다음 달 경영진 진용을 확정할 전망이다. 통상 환경이 불확실한 만큼 새 경영진이 내년 사업 계획을 처음부터 직접 짜게 하겠다는 취지다. 인사 시기를 앞당기는 것 자체가 재계의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올해 재계 인사 키워드로 '안정'을 많이 꼽는다. 10대 그룹 영업이익이 3분기까지 540조원을 넘었다. 성과를 낸 경영진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셈법이라는 관측이다. 연속성, 책임경영, AI 경쟁력이 핵심 기준으로 거론된다.

틀린 판단은 아니다. 다만, 지금 실적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IT·전자 업계 이익 대부분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들었다. 사이클 바깥 사업은 사정이 다르다. 메모리 값이 뛰면서 가전과 TV는 원가 부담을 떠안았다. AI 가전을 내세울수록 메모리를 더 넣어야 하는 역설도 생겼다.

가격을 올리자니 수요가 꺾이고, 버티자니 수익이 깎인다. 허리띠를 졸라매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사이 중국 업체들은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 과반을 가져가며 안방까지 파고들었다. 같은 그룹 안에서도 한쪽은 잔치를 벌이고, 다른 한쪽은 묘수를 찾아야 하는 처지다.

그래서 이번 인사에서 '안정'의 의미는 분명해야 한다. 잘되는 사업의 수장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려운 사업에 해법을 낼 사람을 앉히는 것까지가 안정이다. 실적이 좋은 지금이 오히려 체질을 바꿀 여유가 있는 때다.

부문장이 사업부장을 겸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겸직 해소 여부, 6명이던 부회장단이 1명으로 줄어든 LG의 1인 부회장 체제 유지 여부 같은 관전 포인트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모인다. 누구에게 어떤 숙제를 맡길 것인가.

안정은 '관리'가 아니라 '실행'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다. 호황기 인사는 실적에 대한 보상이면서 다음 불황에 대비한 보험이다. 보험은 사고가 나기 전에 들어야 한다. 사이클이 꺾인 뒤 사람을 바꾸면 이미 늦다.

호황이 길어질수록 착시도 깊어지는 법이다. 숫자가 좋을 때 판을 지키는 것과 다음 판을 준비하는 것은 다르다. 올해 인사가 어느 쪽을 택했는지는 내년 성적표가 말해줄 것이다.

김시소 기자 sis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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