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국-베트남 800년의 인연

홍대순 광운대 경영대학원 교수.
홍대순 광운대 경영대학원 교수.

아마 우리에게 '베트남'은 휴양지 다낭의 바다, 쌀국수의 향, 달콤한 연유커피 그리고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K-팝 리듬으로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은 박항서, 김상식 감독이 만든 축구 기적, 일자리와 기술 그리고 젊은 문화가 함께 들어온 나라로 기억된다.

오늘의 한-베 관계를 우리는 흔히 '수교 34년'이라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조용히, 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약도, 외교도, 무역도 없던 시절에 이미 시작된 인연. 한 왕조의 피가 바다를 건너 성씨가 되었고, 그 성씨가 오늘까지 이어진 이야기다.

13세기 초, 리 왕조(Ly dynasty)가 격변에 휩싸였을 때, 왕족은 멸문 위기에 놓였다. 그때 한 왕자가 바다를 건넜다. 그의 이름은 이용상(Ly Long Tuong). 그는 베트남 창업 군주 리태조 후손이었다. 리태조는 수도를 탕롱, 오늘의 하노이로 옮기며 국가 기틀을 세운 인물로, 베트남인들의 깊은 존경을 받는다. 하노이 도심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놀라운 사실은, 같은 인물을 기리는 동상이 대한민국에도 서 있다는 점이다. 경북 봉화의 땅 위에 베트남 왕조의 상징을 기리는 조형물이 있다. 한 나라의 시조를 다른 나라가 기리는 일은 세계사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고려는 망명해 온 왕자를 품었다. 그에게 '화산(花山)'이라는 본관을 내렸고, 그날 이후 베트남 왕자의 피는 한국의 성씨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화산 이씨 시작이다. 몽골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절, 이용상은 옹진 일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망명자가 고려 장수가 돼 고려 백성을 지킨 것이다. 이 인연은 문서가 아니라 시간으로, 조약이 아니라 함께 겪은 운명으로 맺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의 13대손인 '이장발'은 임진왜란 당시 19세 나이에 문경전투에서 왜적에 대항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으며, 그의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 봉화에 있는 충효당이다

베트남 북부에는 'Hoa Son(화산)'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다. 고려에서 받은 본관 이름이, 베트남 땅의 사당 이름이 됐다. 봉화와 하노이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같은 기억을 다른 언어로 간직하고 있다. 한쪽에는 왕조의 시조가, 다른 한쪽에는 그 후손 발자취가 서 있다.

오늘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한국 기업의 베트남 누적 투자는 세계 최상위권에 이르며,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이 현지 산업과 고용에 깊이 기여하고 있다. 기술과 자본, 사람과 문화가 양방향으로 흐르며 두 나라는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러나 이 연결 뿌리는 34년이 아니라 800년 시간 속에 내려 있다.

1226년, 한 왕자가 고려에 닿아 한국의 성씨가 된 사건. 이것이야말로 양국이 함께 기념해야 할 가장 상징적인 유산이 아닐까. 이제 한-베 800년 인연을 함께 기념하자. 과거를 기리는 일은 단지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의 역사였다. 이제는 그 사실을 서로의 내일로 이어갈 차례다.

홍대순 광운대 경영대학원 교수 hong.daesoon@kw.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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