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은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고,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으며, 신앙의 시대이자 불신의 시대였다. 그것은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으며,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앞에 두고 있었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곧장 천국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또 다른 방향으로도 곧장 나아가고 있었다.”
최근 넘쳐흐르는 인공지능(AI) 관련 논문들을 읽다 보면 1859년 발표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이 이상하게도 자주 떠오른다.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런던과 파리를 배경으로 혁명과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분출되는 군중의 걷잡을 수 없는 광기를 냉철하게 포착한 걸작이다. 디킨스가 혁명의 야누스적 두 얼굴을 절묘한 대구법으로 표현한 이 첫 문장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AI 혁명의 모순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 다리오 아모데이, 샘 올트먼 등 AI 혁명을 이끄는 기업가들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능성을 제시하며 “우리 앞에 모든 것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AI가 질병을 정복하고,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풍요로운 미래가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이 인간이 만든 AI에 의해 완전히 대체된다면 과연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디킨스의 표현처럼 모두가 천국으로 향한다고 믿지만 우리가 도착하는 곳은 오히려 지옥일지도 모른다. 동일한 기술을 두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라는 정반대의 미래가 동시에 전망되는 모순된 현실이야말로 AI 혁명을 맞이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산업혁명과 AI 혁명은 무엇이 다른가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는 전기, 컴퓨터, 인터넷처럼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범용기술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AI 혁명을 산업혁명에 비유한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기계를 통해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체했듯이 AI 혁명은 인간의 인지노동을 대체하고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업혁명의 기계는 인간의 근육을 대체했지만 인간의 판단과 지시를 필요로 했다. 컴퓨터는 인간의 계산과 정보처리 능력을 획기적으로 확장했지만 무엇을 계산할지는 여전히 인간이 결정했다. 반면 AI는 단순한 계산을 넘어 추론하고 스스로 새로운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자율적인 AI 에이전트가 로봇과 결합하면 물리적 세계에서도 행동할 수 있다. 즉 기계는 인간의 능력을 보완 또는 대체했지만, AI는 인간이 수행해 온 역할, 나아가 인간 자체를 대체할 가능성을 열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예언대로 생물학적 인간(Human being)이 아닌 근대 이후 형성된 지식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의 인간(man)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산업혁명이 생산성 향상과 사회적 번영으로 연결되기까지는 한 세대 이상이 필요했지만 AI의 발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미 산업혁명 초기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을 능가하는 반AI 포퓰리즘의 등장 가능성도 감지된다.
◇생산성의 혁명인가, 노동의 종말인가
최근 AI 혁명에 관한 담론이 생산성 존재 여부에 쏠려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AI가 어떻게 생산과 소득분배의 관계를 바꿀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경제는 기술 발전으로 기존 일자리가 사라지더라도 새로운 산업과 직업이 등장하면서 고용이 다시 창출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농업의 기계화로 농민이 줄어들었지만 제조업이 이들을 흡수했고, 제조업의 자동화가 진행되자 서비스업이 새로운 고용의 중심이 되었다. 기술은 노동을 대체하는 동시에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과업을 창출했다.
경제학자 대런 아세모글루가 강조하는 자동화의 대체효과와 새로운 과업의 복원효과가 이러한 역동성을 설명한다. 자동화는 노동의 몫을 줄이지만 새로운 과업의 등장은 노동의 역할을 회복시킨다. 과거의 기술혁명에서는 두 효과가 서로 경쟁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새로운 노동 수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AI 혁명에서는 이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AI가 기존 과업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새로운 과업이 충분한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나아가 AI가 기존 과업을 대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롭게 등장하는 과업까지도 빠르게 수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된다면 노동시장의 복원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실업자가 증가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성과는 불완전하게나마 임금과 고용을 통해 사회 전체에 분배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 없이도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생산성 향상이 반드시 가계소득 증가로 이어질 이유가 사라진다. 이렇게 될 경우 AI로 인해 생산능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가 부족한 원하지 않는 경제가 만들어진다.
◇노동에서 해방된 인간은 행복할 것인가
AI 혁명의 충격은 경제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노동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노동은 단순히 소득을 얻는 행위만은 아니었다. 직업은 개인에게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했고, 노동을 통한 성취는 자존감과 삶의 의미를 제공했다. 그런데 AI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글을 쓰고, 분석하고, 코딩하고, 진단하며, 심지어 창작까지 수행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질문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이 생계를 위해 반드시 노동해야 하는가라는 경제적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이다.
AI가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킨다면 이는 분명 문명의 진보다. 그러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삶의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뜻하지는 않는다. 소득이 보장되더라도 사회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인간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등장한다. AI가 거의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험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음악, 인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교감,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행위가 새로운 희소성을 갖게 될 수 있다. 기계가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둔다고 해서 인간끼리 두는 바둑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미래에는 '100% Human'이라는 표시가 새로운 프리미엄의 상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중심 서비스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적 경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더라도 그 수요를 뒷받침할 구매력이 소수에게 집중된다면 새로운 인간 서비스 시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인간성은 기술만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인간이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존중받으며 스스로 삶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새로운 권력의 탄생, 민주주의는 안전한가
AI 혁명이 산업혁명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경제적 권력과 인지적 권력이 동시에 집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당시 자본가는 공장과 기계를 소유했다. 그러나 오늘날 AI 기업은 컴퓨팅 인프라와 데이터, 알고리즘뿐 아니라 인간이 정보를 얻고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소수의 기업이 AI 모델과 클라우드 인프라를 지배하고 수많은 기업과 개인이 이들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집중은 단순한 시장 독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AI가 정보의 생산과 유통, 여론 형성, 의사결정에 깊숙이 개입할수록 기술 권력이 정치적·사회적 권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미국 AI 기업인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피터 틸은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특히 AI 에이전트가 개인을 대신해 정보를 검색하고 상품을 구매하며 금융거래와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시대에는 누가 AI의 목표와 행동규칙을 설정하는지가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인간이 AI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AI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기업이 인간의 선택을 구조적으로 좌우할 수 있다.
여기에 기존의 대리인 문제도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AI는 인간처럼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잘못 설정된 목표를 극단적으로 수행하거나 사용자의 진정한 의도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AI 제공기업의 이익과 이용자의 이익이 충돌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AI가 자율적으로 행동할수록 정보 비대칭과 감시의 어려움은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AI 혁명의 핵심 질문은 단순히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AI를 누가 소유하고, 누가 통제하며,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게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AI 혁명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사회계약의 재구성이다
우리는 흔히 AI 혁명의 성패를 모델의 성능, 컴퓨팅 능력, 투자 규모, 생산성 증가율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만으로 AI 혁명의 본질을 이해할 수는 없다.
산업혁명이 단순히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끝나지 않았듯이 AI 혁명도 더 뛰어난 알고리즘의 개발로 완성되지 않는다. 산업혁명은 도시화, 공교육, 노동법, 사회보험, 보통선거권의 확대 등 사회제도 전반의 변화를 수반했다. 기술이 생산방식을 바꾸자 사회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
AI 혁명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에는 변화의 속도가 사회제도의 적응 능력을 훨씬 앞지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법률과 제도, 교육체계, 사회적 합의는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이 더 이상 소득분배의 중심 통로가 아닐 수 있는 경제에서 새로운 분배체계를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 수행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AI가 담당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목적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AI가 인간의 판단에 깊이 관여하는 시대에 책임과 권한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소수 기업이 AI의 핵심 인프라를 통제하는 상황에서 시장경쟁과 민주적 통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
기본소득, AI 자본에 대한 사회적 소유(또는 기본자본), 노동자의 생산성 이익 공유, 인간 중심 서비스에 대한 투자 등 다양한 대안이 논의되고 있다.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AI의 기술적 성과가 저절로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경제적 궁핍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전망했다. 동시에 그는 풍요를 얻은 인간이 자유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았다.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 AI는 케인스가 상상했던 미래를 더욱 현실적인 질문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케인스가 상상한 풍요로운 미래는 기술의 발전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생산성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인간이 노동과 소득의 관계에서 벗어나서도 존엄과 삶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어떤 경제 및 정치질서를 설계하고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에 달려 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방식을 바꾼 혁명이었다면, AI 혁명은 인간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지를 묻는 혁명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AI가 인간보다 더 똑똑해지는 미래가 아니다. AI가 만들어낼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충분히 고민하기도 전에 그 미래가 이미 현실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어쩌면 AI 혁명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니라, 그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우리의 사고가 너무 느리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유재수 싱귤래리티 금융 소사이어티(SFS) 간사 yoojs6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