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F 스타트업 이야기] 〈103〉관료제의 버그를 고치는 사람들, 우리는 '정책 해커'다

김병진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사무총장·경영학 박사
김병진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사무총장·경영학 박사

2013년 미국의 건강보험 가입 사이트 '헬스케어닷고브(Healthcare.gov)'가 개통 직후 멈춰 섰다. 보험 가입을 돕겠다며 만든 시스템이 정작 시민의 진입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백악관은 기술 전문가들을 현장에 급파했고, 이들은 누구의 탓인지 따지는 대신 시스템 밑바닥의 오류 코드를 추적해 서비스를 살려냈다. 이 경험은 이듬해 공공 혁신 전담 조직인 '미국 디지털 서비스(USDS)' 출범의 모태가 됐다. 거대한 관료제의 작동 오류를 찾아 고치는 사람들, 나는 이들을 '정책 해커(Policy Hacker)'라 부른다.

정책 해커는 제도를 전복하지 않는다. 제도가 본래 품었던 선한 가치를 살려내기 위해 실행의 경로를 다시 짜는 실천가다. 시빅테크 단체 '코드 포 아메리카'의 설립자 제니퍼 팔카는 저서 '리코딩 아메리카'에서 정책의 선의가 경직된 집행 체계에 갇혀 질식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공익·소셜 생태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현장에서 마주한 정책 해킹은 세 단계로 작동한다.

첫째, 사람의 잘못이 아닌 시스템의 결함을 찾아내는 '버그 식별(Bug Hunting)'이다.

국세청의 2026년 공익법인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기부금 수익 11조 원 중 38%가 상위 15개 대형 법인에 쏠려 있다. 그러나 사회문제를 가장 밑바닥에서 해결하는 풀뿌리 조직과 소셜 스타트업의 현실은 척박하다. 현장의 당사자를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쏟아야 할 시간의 태반을, 한두 명의 실무자가 보조금 정산, 기부금 증빙, 서류철 작성에 쏟아붓고 있다. 공무원 입장에서도 감사의 책임을 피하려면 서류 통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그 방어적 행정이 정작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시간을 앗아간다면, 그것은 현장의 태만이 아니라 시스템 설계의 오류다. 규정은 완벽히 지켰으나 제도의 본래 목적은 질식하고 마는 본말전도(本末顚倒)다.

둘째, 경직된 규정을 우회하여 실질적 길을 내는 '우회로 설계(Workaround & Prototyping)'다.

우리가 공익 플랫폼 '모두의기부'를 통해 던진 화두는 거창한 신기술이 아닌 '1,000원'이다. 대형 지원금에만 목을 매던 작은 조직들이 단 100명의 이웃 지지자를 모으는 '씨앗기'부터 시작해, 정기후원자를 확보하는 '성장기'를 거쳐 스스로 서게 만드는 자립 사다리다. 전용 가상계좌와 투명한 플랫폼 정산으로 모금의 법적 리스크를 지우고, 시민의 1000원에 재단이 1000원을 얹어주는 일대일 매칭으로 참여의 효능감을 증폭시켰다. 1000원의 본질은 액수가 아니다. 공모사업 지원금 수령자에 머물던 공익 스타트업을 당당한 자립의 주체로 탈바꿈시키는 구조의 전환이다.

셋째, 현장의 검증된 해법을 제도의 표준으로 안착시키는 '제도적 패치(Policy Patch)'다.

공익 현장에 절실한 것은 1년 뒤면 쓰지 않고 방치될 보여주기식 홈페이지가 아니다. 당장 잡무를 줄여 현장의 미션에 몰입하게 해줄 가벼운 도구다. 이제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도 일회성 구축 지원에서 벗어나 '비영리 행정 AX(AI 전환) 바우처'로 진화해야 한다. 회계·후원자 관리·문서 자동화 클라우드(SaaS)를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정책의 성과 지표 역시 전산망 보급 건수가 아니라, '행정 서류 작성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가', '사회적 가치에 직접 몰입한 시간이 얼마나 늘어났는가'로 측정되어야 마땅하다.

현장의 헌신은 숭고하다. 그러나 헌신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비효율과 관행적 희생까지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선의에만 기대어 지탱되는 시스템은 결국 무너진다. 1000원의 마중물이 작은 조직의 자립 뼈대를 세우고, 소프트웨어 도구 하나가 본래의 사회적 미션을 되찾아주는 변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혁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정책은 사람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현장에서 땀 흘리는 이들이 지치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시스템의 버그를 고쳐내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걸어가는 '정책 해커'의 길이다.

김병진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사무총장·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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