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특집] 쫓기는 부품산업

인구 12억의 거대시장. 무한한 부존자원과 잠재력을 겸비한 나라. 군사력에 이어 이제 경제력으로 아시아 맹주자리를 꿈꾸는 나라. 대륙 중국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7월,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한 홍콩을 접수한 것을 계기로 중국은 이제 더욱 위협적인 존재로 우리 앞에 바짝 다가섰다. 경제대국의 기치를 내건 중국의 부상과 이로 인해 한국경제, 특히 전자산업과 부품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할 것이다.

거품경제가 걷히면서 극심한 경기불황과 이로 인한 사업구조 조정 등 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현재 중국의 전반적인 경제상황은 과거에 비해서는 그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고성장의 정점을 이루었던 지난 93,94년까지만 해도 연평균 12%의 고성장을 지속했으나 지난해부터 이같은 고성장에서 이탈, 저성장세로 돌아섰다.

이는 중국정부가 정책적으로 경기 과열에 따른 거품과 이로인한 부작용을 사전에 예방하고,안정적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연착륙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방침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전자산업 만큼은 중앙정부의 소프트랜딩 방침이 무색할 정도로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 전자공업부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전자산업 총 생산량은 금액으로 약 2천9백80억 위안(元, 인민폐)에 달한다. 이같은 수치는 95년에 비해 무려 20.7% 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29조8천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극심한 불황으로 2.4% 성장에 그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특히 중국의 전자산업은 올해도 약 17.5% 성장한 3천5백억 위안을 달성, 당분간 고도성장이 지속될 것이란게 중국 정부당국의 예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올해 중국 전자산업의 성장세가 지속돼 통신교환기 등 설비제품시장은 50%, 가전시장은 20%, 부품시장은 30% 정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품목별로는 전자동교환기의 수요가 25만 회선으로 지난해보다 25%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며 이동통신기기, 무선호출기, 전화기, 팩시밀리 등 통신분야가 20~50%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컴퓨터 및 관련기기의 수요도 크게 늘어나 PC시장규모는 약 2백40만~2백70만대로 금액으로 4백억 위안에 달해 지난해보다 60%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며 정보화 바람을 타고 컴퓨터망의 건설도 크게 확산돼 DB, 망, 시스템, 국제게이트 등과 공용망도 세계 각 대형시스템과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구축된 10만개의 DB망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와 정보서비스 사업이 크게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전부문에서는 컬러TV가 전년대비 20% 가량 늘어난 1천8백만대의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25인치형과 28~29인치급의 대형제품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특히 최근들어 도시지역에 이어 농촌지역도 21인치급 이하의 소형TV보급이 눈에 띄게 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CCTV용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장된 흑백TV 보급도 꾸준히 늘고 있다.

다만 VCR시장은 비디오CD의 공세로 수요가 다소 떨어져 총 수요량이 3백50만대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음향기기부문에서는 카세트테이프녹음기의 수요가 2천1백만대로 전년대비 5% 정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시스템컴포넌트의 경우 수요가 3백만대로 예상되며 오디오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 역시 중국의 부상을 실감케 해 중국의 전자산업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무역흑자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전자공업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전자부문의 수출은 전년대비 30% 증가한 2백10억 달러를 기록한 반면 수입은 11.3% 늘어난 1백80억 달러에 그쳐 중국의 수출증진책과 수입억제책이 크게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산업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에 맞게 중국정부의 전자산업 육성의지 또한 대단하다. 중국은 전자산업을 장차 중국경제를 지탱해 나갈 4대 지주산업의 하나로 선정, 이를 집중 육성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장단기 전략 수립, 주요 프로젝트관리, 연구개발정책, 인력육성, 부품국산화 등 각종 전략을 전자공업부가 수립, 치밀하게 추진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정부는 이제 양적성장에 걸맞는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정책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중국에서 생산된 전자제품이 품질면에서 선진국의 제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음에도 상당히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 브랜드 인지도의 중요성을 인식해 투자유치를 범용제품 중심에서 첨단기술 중심으로 바꾸고 있다.

이처럼 가전에서 컴퓨터, 통신으로 이어지는 중국 전자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엄청난 잠재 수요는 결국 핵심기간산업인 부품산업의 자생력을 키우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과 함께 세계 전자부품 생산의 한 축을 담당해온 우리나라로서는 강력한 경쟁대국을 맞게 돼 국내 전자산업 구조조정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중국산 부품은 국내 부품업체들에게 강력한 경쟁제품으로 인식되며 세계시장 곳곳에서 한국산 부품의 세력확산에 제동을 걸고 있다. 주무기는 물론 국산에 비해 평균 30~40% 가량 싼 가격이다. 거기에는 평균 10분의 1수준인 인건비가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품질은 아직 우리를 따라 오려면 멀다고 자위하고 있지만 최근엔 그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는게 부품업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중국부품의 추격엔 일본과 미국의 기술과 자본이 깊게 관련돼 있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을 해외생산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선진국들은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한국의 경제환경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중국으로 대거 등을 돌렸다.

이것이 중국의 전자산업육성책과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지면서 중국산 부품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제고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엔 대만 부품업체들의 중국 본토행도 줄을 잇고 있다.

국제경쟁력을 높인 중국산 부품은 현재 미국 등 주요 부품시장에서 우리나라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PCB, 칩부품, 통신부품 등 기술집약적인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견제를 받지 않는 품목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부존자원이 풍부한 중국은 세라믹스재료 등 기초원자재 비중이 높은 재료성 부품부문에서는 한국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고 있다.

비단 세계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시장에서도 중국산 부품의 바람은 거세다. 이미 국내 시장의 30% 이상을 잠식해 버린 스피커용 페라이트자석을 비롯, 컴퓨터용 DC팬모터, 망간 1차전지, 로엔드 수정디바이스, 컨덴서, 저항기, 트랜스 등 일반부품시장 전반에 중국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국내 업체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성격적으로 단순 생산기지에 불과한 동남아 신흥 경제부흥 국가들의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은 바로 거대 시장이면서 최대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국내 부품업체들의 구조조정과 정책변화를 부채질 하는 최고의 변수로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막강 중국의 등장으로 우선 국내 부품업체들의 가격위주 정책에 쐐기가 박혔다. 과거 일본산 부품에 비해 싼 가격으로 승부했던 마케팅전략은 이제 저가 중국산의 벽에 막혀 먹혀들 여지가 적다. 때문에 위로는 일본, 아래로는 중국에 샌드위치 마크를 당하고 있는 국내 부품업체들은 과감히 가격정책을 포기하고 차별화된 품질과 신뢰성 제고로 정책적인 전환을 꾀하고 있다.

자동화를 통한 생산성 극대화나 생산라인의 해외이전도 중국의 발호에 따른 두드러진 변화. 높은 코스트를 만회하기 위해 자동화로 재무장,생산성을 높여 가격경쟁력을 제고하거나 이것이 어려우면 생산기지를 중국,동남아 등 해외공장으로 이전하는 것이 불가피해진 탓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부품업체들이 해외로 생산라인을 이전했거나 이를 현재 추진중이다.

일본에 근접하는 기술개발과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주요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차피 중국과는 가격으로 승부하기 어렵고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기가 어렵다면 한국형 시장,이른바 중국의 가격대와 일본에 가까이 가는 품질과 가격을 갖춘 중, 고급제품의 개발이 요구되기 때문. 여기에는 글로벌소싱 전략에 따른 세계적인 부품 구매패턴의 변화도 작용하고 있다.

다품종 소량형 고부가부품 개발도 최근 중국의 추격을 바라보는 국내 부품업체들의 유력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나 아직 제품 구색면에서 중국은 범용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기술집약도가 높은 고부가제품 개발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대륙 중국의 부상, 이것은 분명 경제전반에 있어 전자산업의 기여도가 어떤 나라보다 높은 우리에게는 호재일 수 없다. 그러나 경쟁은 발전의 디딤돌이 되는 것처럼 중국의 부상은 다소 방만하게 운영돼온 국내 전자산업, 특히 전자부품산업의 질적인 구조변화와 내실강화를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호재로 작용할 수 도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희망섞인 진단이다.

<이중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