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에 나는 사전을 보지 않고도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있었다. 하루에 일백 단어를 외우면서 석 달 동안에 약 일만 단어를 숙지했다. 물론, 잊어버린 단어도 있겠지만 일단 숙지되었던 것이어서 앞뒤의 문장을 보면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영어 오천 단어를 알면 영어 소설 80%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일만 단어의 숙지로 영어 소설을 완벽하게 읽을 수 있었고, 컴퓨터 원서를 막힘 없이 이해했다. 특히 컴퓨터 용어에 대해 숙지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없이 이해했다. 그때부터 나는 원서를 구입해서 독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어의 이해도 빨라져서 처음에 구입했던 컴퓨터 해설서를 판독했다.
나는 항상 컴퓨터 영어 원서를 지니고 다녔는데, 그것을 가방에 넣지 않고 그냥 들고 다녔다. 그것은 뽐내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고, 어디서나 항상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낮에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틈틈이 읽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닐 때나 어딘가로 이동중에 그 시간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어떤 때는 길을 걸으면서도 원서를 읽었다. 그래도 읽어야 될 책은 너무나 많았고, 배워야 할 것은 수두룩했다. 나중에는 원서를 사는 돈이 문제가 되었다. 달러나 엔화로 환산해서 가격이 매겨진 영어 원서나 일본어 원서는 비쌌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유흥비를 절약했다. 직장에서 월급을 타면 하숙비와 최소한의 교통비를 제외하고 돈을 쓰지 않았다.
『이봐, 최영준이, 그거 읽기는 읽는 거야?』
어느 날 연구실에서 PABX(사설전자교환기)를 지키면서 영어 원서를 읽고 있을 때 기술실의 차장 이길주가 들어와서 힐끗 보더니 물었다. 내가 컴퓨터 영어 원서를 지니고 다니던 초기에는 괜히 폼을 잡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는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런데 이제 열심히 들여다보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띄자 의아해하면서 물었던 것이다.
『예, 읽고 있습니다.』
『어디 봐. 무슨 책인데?』
이길주 차장은 내가 들고 있는 영어 원서를 집어들고 펴보았다. 회로이론에 대한 역사와 논문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영어를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컴퓨터 이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정말 읽고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언제 영어를 그렇게 공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