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업체 부품 공개입찰제 공급價 인하수단으로 "악용"

 세트업체들이 부품업체를 상대로 지난해부터 도입하기 시작한 공개입찰제가 단가인하 수단으로 「전락」했다.

 IMF 체제를 거치면서 떨어질대로 떨어진 부품가격이 공개입찰제로 인해 바닥을 모르고 더 추락하고 있는 것. 부품업체들은 『도입 초기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사항이지만 최근들어서는 공개입찰제가 더욱 교묘한 단가인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에 있는 한 부품업체. 수동부품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최근 한 세트업체로부터 공개입찰에 응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었다. 단지 입찰에 참가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당일 입찰장에 도착한 담당자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미국계업체는 물론 해외시장에 저가제품을 무더기로 뿌리는 대만업체까지 입찰장에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한한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입찰가를 써내야만 했다. 기존 가격보다 10% 이상 낮췄다. 한계 원가에 근접한 가격이었다.

 공개입찰은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무절제한 덤핑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다. 해외의 경우 공개입찰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찰시행업체는 시장상황·제품원가 등 여러 조건을 토대로 적정가를 제시하는 것이 관례다. 응찰업체들은 이를 기초로 상황에 맞춰 입찰가를 제출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최저가입찰제와는 다르다. 또 해외에서 공개입찰은 대부분 1년에 한번씩 열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국내의 공개입찰제는 거의 최저가입찰제와 진배가 없다. 시도 때도 없다. 세트업체들이 원하면 적정가격을 제시받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입찰가를 써내야 하는 상황이다. 응찰업체들은 「상대방이 대략 몇% 정도 값을 내릴테니 우리는 무조건 그보다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추측과 억지가 난무할 수밖에 없다. 공개입찰제가 부품가 인하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주장은 이 때문이다.

 더욱 심한 것은 낙점(?)받은 업체라도 어떤 제품을 어느 정도 물량까지 공급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일본계 부품업체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경우 공개입찰시 공급품목과 물량 등을 자세히 알려준다』고 말한다. 세트업체와 부품업체가 일대일 상황에서 수급과 공급의 조화를 이룬다는 얘기다.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부품업체들은 국내 세트업체들의 경우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강한 불만을 제기한다. 단지 입찰가만을 제출하라는 것은 그나마 봐줄만하다. 부품공급의 안정성을 위해 입찰에 떨어진 업체들에까지 낙찰가로 다시 제품을 공급해줄 것을 요청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부품업체들의 설명이다. 세트업체들은 공개입찰로 부품공급가를 낮추고, 또 다른 업체들까지 끌어들여 제품공급의 안정성을 기하는 등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식」이다. 반면 부품업체들은 영광뿐인 상처를 안고 끌려다닐 뿐이다.

 최근 부품업체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더이상의 부품가격 인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산되는 상황이다. 『한계원가 이하로는 공급할 수 없다』며 『상황이 심각해지면 공급거부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부품업체들은 『IMF 체제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서서히 경제가 회복되는 상황에서는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공개입찰제의 향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이일주기자 forextra@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