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밀러 스탠퍼드대 석좌교수 대 이단형 소프트웨어진흥원장
실리콘밸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윌리엄 밀러(William F. Miller,76)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세계적 컴퓨터 전문가이기도 한 밀러 교수는 스탠퍼드 부총장 재직시 스탠퍼드와 실리콘밸리를 연계, 실리콘밸리가 세계 IT(정보기술)산업의 메카로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Asia-Pacific Reseach Center) 연구위원이기도 그는 99년10월 한국∼스탠퍼드간 IT 협력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난해 순수 외국인으로는 처음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올해 3년째인 이 프로그램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IT관련 종사자 50명을 매년 선발해 2주간 스탠퍼드대에서 연수시키는 것으로 한-미간 IT교류 강화에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스탠퍼드간 IT 협력프로그램 창설 당시 밀러 교수의 한국측 파트너로 활약했던 이단형 (55) 소프트웨어진흥원장이 밀러 교수를 만나 세계 IT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국제표준협회 소프트웨어분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원장은 시스템공학연구소 연구부장 등을 역임한 ‘대가급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 원장이 묻고 밀러 교수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예정된 1시간 30분을 넘겨 시종 진지하게 진행됐다.
―이단형 원장=밀러 교수님, 반갑습니다. 컴퓨터, 통신, 반도체 할 것 없이 요즈음 세계 IT 경기가 나쁘다는 소리 일색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척 어두운데 우리는 밝은 이야기부터 했으면 합니다. 우선 세계 IT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비결부터 이야기 해 주시죠.
▲밀러 교수= 예,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저는 서너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실리콘밸리에는 아이디어, 특히 매우 독창적이고 우수한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상업화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IT산업에 있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사업 성공의 핵심 키이자 뿌리입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러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존중되고 우대 받았습니다.
둘째는 인력이동인데, 즉 휴먼 모빌리티(human mobility)가 자유로웠습니다. 프로그래머 등 고급 두뇌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탄력적 인재시스템이 있었기에 밸리 기업들은 필요할 때마다 적시에 고급인력을 충원할 수 있었지요. 어떠한 사업이건 사람, 즉 인재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는 휴먼 모빌리티가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러웠고 탄력적이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자본이동 역시 자유로웠다는 점입니다. 아이디어와 함께 자본(돈)은 사업 성공의 절대 요소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자유로운 자본 흐름을 바탕으로 벤처의 자립화를 돕는 벤처캐피털들이 많이 생겨날 수 있었지요.
넷째는 국제적 네트워크가 형성됐다는 점입니다. 기업가 정신을 가진 실리콘밸리의 기업인들이 유럽,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국제 네트워크에는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도 포함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인간관계는 가장 기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 네트워크 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들 외에 한가지 추가한다면 기업환경, 즉 서식지(habitat)가 실리콘밸리에서는 잘 발달돼 있었습니다. 한 예로 공정한 게임의 룰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시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설사 사업 도중 실패했을 때라도 우리는 그를 낙오자로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대신 그가 언제든지 다시 시장에 재도전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실리콘밸리는 이러한 요소들이 잘 조화를 이루었기에 명성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원장=1964년이래 스탠퍼드대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데, 실리콘밸리의 성공에 있어서 스탠퍼드대학이 한 역할은 무엇입니까.
▲뮐러 교수=스탠퍼드와 실리콘밸리는 흔히 성공적인 산학협동 모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사실 실리콘밸리의 역사는 근 100년이나 됩니다. 저는 이를 몇단계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즉 1890년∼1920년, 1920∼1960년,그리고 이후로요. 특별히 1920∼1960년에는 휴렛패커드 등 소위 실리콘밸리의 상징적 기업들이 잇달아 설립된 시기입니다. 그리고 1960년 이후인 세번째 시기에는 실리콘밸리의 경제규모가 매년 9∼10% 성장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였습니다. 또 이 시기에는 새로운 사업인프라 형성은 물론 창업을 돕는 전문 법률가, 전문 회계기업, 전문 인력관리 등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유구한 실리콘밸리 역사에 있어 저는 무엇보다 실리콘밸리 기업이 스스로 재생하거나 혹은 재창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밸리 기업은 경제환경의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변혁, 재생할 수 있는 혁신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스탠퍼드 없는 실리콘밸리는 상상할 수 없지요. 우선 스탠퍼드가 실리콘밸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산합협동 프로그램 결성이 쉬웠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많은 우수한 인력이 배출됐지요. 또 학생 뿐 아니라 스탠퍼드대 교수들 자신도 직접 대학이라는 편안한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벤처기업을 창업하는 모험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또 일부 스탠퍼드 교수들은 기업체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기업의 신기술 상용화 등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요.
제가 오랫동안 대표로 있었던 스탠퍼드연구소(SRI)의 경우에도 IT관련 각가지 원천기술을 개발해 기업체에 제공했습니다. 결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뒷무대에는 스탠퍼드라는 든든한 파트너가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이 원장=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닷컴들이 세계 각국에서 줄줄이 파산하고 있습니다. 세계 IT경제의 성장엔진이었던 닷컴이 이처럼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밀러 교수= 닷컴의 붕괴는 말할 것도 없이 수익(비즈니스) 모델 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즉 닷컴시장에서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닷컴 공급과잉이 있었던 것이죠. 사실 그동안 닷컴은 무리한 수요 전망을 바탕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결국 수요창출에 실패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죠. 또 닷컴의 경영진, 혹은 매니저들이 닷컴 비즈니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도 닷컴 몰락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도 분명히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닷커머들은 버블만 보고 너무 이상에 치우쳤고 광고수익 모델에만 의존하는 범실을 저질렀죠. 하지만 확실한 수익모델을 가지고 있거나 비즈니스 플랜이 잘된 닷컴은 비록 일부지만 수익을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닷컴이 인터넷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인터넷이 창출하는 신경제의 미래에 대해서 저는 낙관하는 편입니다.
―이 원장=하지만 인터넷 경제에 대한 박사님의 긍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계 IT 경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뉴욕테러 사건까지 발생해서 세계 IT경제는 그야말로 설상가상입니다. 세계 IT경제는 언제쯤이나 회복할 수 있을까요.
▲밀러 교수=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입니다. 테러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증권사 애널리스트나 IT시장 전문가, 그리고 내로라하는 IT기업 CEO들도 저마다 세계 IT산업 전망에 대해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판국에 테러사건까지 발생해 세계 IT경기를 전망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번 세계무역센터 및 펜타곤 테러 사건이 회복기미를 보이던 세계 IT 경기에 일정 부분 타격을 줄 것이라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전망이고 장기적으로는 투자가 늘어나 오히려 더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미 보안업체나 영상회의시스템, 그리고 전산시스템 관리 및 수리 업체 등은 반짝 호황을 누리고도 있고요. 저는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만해도 세계 IT경기가 내년 2분기께 회복될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이번 사건 여파로 이것이 조금 더 늦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원장=앞으로 각광받을 IT분야나 기술을 전망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밀러 교수=저는 IT시장이 아직도 젖과 꿀이 흐르는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간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술은 우선 통신분야의 광대역(브로드밴드)과 무선(와이어리스)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인류 삶의 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바이오산업과 나노 테크놀로지 산업도 차세대 유망산업이지요.
―이 원장=한국통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IT산업의 장점과 약점을 평가한다면.
▲밀러 교수=우선 한국 기업가들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합니다. 또 새로운 것에 대해 과감히 도전하는 모험정신도 돋보이며 일을 추진하는 열정과 추진력도 대단합니다.
정부의 지원도 비교적 잘 돼 있으며 휴대폰 보급률, 인터넷 사용률 등 IT인프라도 가히 세계적입니다. 여기에 교육열 또한 어느나라 못지 않게 높아 우수한 인재도 많이 가고 있고요. 반면 한국의 벤처캐피털은 실리콘밸리에 비해 아직 경험이 적고, 일천합니다. 그래서 에쿼티 파이낸싱(equity financing)보다는 데트 파이낸싱(debt financing)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기업과 대학간의 상호연계도 좀 느슨합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한국 IT산업의 성장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원장=마지막으로 한국 IT산업이 세계시장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 주십시요.
▲밀러 교수=한국의 내수시장은 아직 규모가 작습니다. 세계시장과 비교하면 더구나 작고요. 이런 헌실에서 한국의 IT상품이 세계 시장에 진출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려면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미국을 위시해 유럽,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국에 한국의 IT 상품을 수출할 수 있도록 전략적 요충기지를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물론 현지인 채용 등 현지화와도 중요하고요. 그리고 정부는 벤처기업이 세계적 상품을 개발, 상품화할 수 있도록 환경만 조성해 주면 됩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정한 룰이 시장에 형성돼 실패자가 언제든지 다시 시장에 재진입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리=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
밀러 교수 이력
△퍼듀(Perdue)대 학사(49년) △퍼듀대 석사(51) △퍼듀대 박사(56) △스탠퍼드대 교수(65∼현재) △스탠퍼드대 부총장 및 교무처장(프로보스트)(71∼78) △SRI(스탠퍼드연구소) 인터내셔널 대표(79∼90) △SRI 개발 대표(82∼90) △대비드 사노프 리서치 센터 대표(87∼90) △스탠퍼드 석좌 교수(97∼현재)
이단형 원장 약력
△서울공대 학사(71) △미국 아더 D. 리틀대 경영과학 석사(83) △미국 버지니아대 정보시스템 박사(90)
△ISO/IEC 국제표준기구 시스템공학전문위원 에디터 겸 의장 (91∼현재) △시스템공학연구소 선임연구부장(73∼98) △LGEDS시스템 부사장(99∼2000.9)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원장(2000. 10∼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