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갑을 관계

계약의 주체를 보통 ‘갑’과 ‘을’로 표현한다. ‘갑’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약자로 지칭하고 ‘을’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약자로 표현한다. 이 때문에 ‘갑을 관계’란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단어로 쓰일 때가 많다.

 ‘갑을 관계’란 표현을 가장 많이 쓰는 때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사이를 설명하는 경우에서다. 최근 동반성장을 강조하면서 대기업과 협력업체 사이에서 수평보다는 수직적 관계가 되곤 한다는 의미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은 “동반성장 의지를 내비치는 여러 행사가 많이 열리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아직도 상생 분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중소기업 CEO들조차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대기업 임원도 아닌 담당 실무자에게 불려가 혼난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대기업 성과는 대단하다. 우리 대기업들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업종 내 최고 기업 반열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부품이나 장비를 공급하면서 큰 기회를 잡아 성공한 기업도 있지만, 여전히 ‘철마다 다가오는 부품단가 하락 압력을 견뎌야 했고, 기술과 인력만 빼앗겼다’고 볼멘 소리를 하는 중소기업도 있다.

 현대 산업사회는 경쟁구도는 개별 기업 사이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얼마나 좋은 협력업체를 갖고 있는가가 경쟁의 핵심이다. 기업 혼자 잘 달려서 1등을 하는 게 아니라 협력 부품·장비업체가 포함된 생태계(Value Chain)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최고 기업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단기간 내 경제성장을 이뤄낸 대표적 나라로 꼽힌다. 이 사이에서 대기업에 대한 집중적 관심과 배려가 있었던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이제는 대기업에 집중했던 노력을 중소기업으로까지 넓혀야 할 때다. 건강하고 튼실한 경제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심화돼서는 안 된다.

 ‘갑을 관계’가 그동안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여러 기업군들이 합리적 절차를 통해 동반성장을 모색하는 사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승규 전자담당 차장 se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