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상상(想像), 도전과 연습이 필요하다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프랑스 유학 5년 동안 지도해 준 장클로드 데르니암 낭시 제1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필자를 담금질했다. “당신의 생각을 꺼내 보여 줘요.” 남의 연구 내용을 개선하는 일을 그만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보여 달라는 말이었다. 이 화두를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때부터 필자는 '상상'을 본격 시작한 셈이다.

상상이란 세상에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아는 것을 재료로 하여 나만의 생각을 더해서 새로운 생각을 그려 내는 것이다. 상상을 잘하기 위해서는 이미 아는 재료가 많아야 한다.

지난날 우리는 상상의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부족했다. 상상할 겨를조차 없었다. 선진국이 축적해 놓은 상상 재료를 받아들여서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그들의 상상을 우리의 상상으로 착각했다. '추격형' 시대를 살아오면서 지니게 된 우리 모습이다. '추격형'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서구 중심주의가 담겨 있다. 서구 선진국이 이뤄 놓은 것이 선(善)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역으로 '선도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선진국 문턱에서 우리나라가 '선도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을 거쳐 개념 설계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도전의 경험과 상상의 경험을 쌓아 가며 실패의 아픔도 개념을 만드는 힘을 기르는 데 써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추격형' 시대를 거치며 도전의 토대를 마련해 왔다. 외형으로는 경제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우리에게 도전 재료가 쌓였다. 그러나 추격의 과실이 너무나 달콤한 탓인지 우리는 여전히 '추격형' 시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선도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전이 필요하다.

그 도전을 시작하기 위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기존에 미래 전략을 수립하던 방식을 과감히 던져 버리는 시도를 했다. 현재 보유한 기술의 선형 발전을 가정하는 방식으로는 환경의 불확실성을 대비하기 어렵고, 도전 목표 설정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ETRI가 만든 '지능정보사회로 가는 길-기술발전지도 2035'에는 도전이 담겨 있다. 특히 '인류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떠한 모습인지 집중해서 고민했다. 그저 가능성이 있는 미래가 아니라 도전 경험을 쌓기 위해 '선호하는 미래' 모습을 설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원하는 미래를 실현시켜 줄 제품이나 서비스가 무엇일지 설계해서 신개념 형상물로 만들어 보여 줬다. 신개념 형상물을 구현할 핵심 기술은 무엇이고 어느 정도의 수준이 필요한지 거꾸로 구성해서 '기술발전지도'를 완성했다. 기술발전지도의 시작을 여느 때처럼 현재 기술이 아닌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한 독창 사고력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부터 기술까지 촘촘히 연결된 '기술발전지도'를 만들려는 연구진의 시도는 미래 전망 전략이라는 점에서 뜻있는 도전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은 다음에 또 다른 시도에서 좋은 상상의 재료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가 ETRI 원장이 되면서 내세운 첫 번째 경영 목표는 '신개념 창출'이었다. 40년 가까이 연구원으로서 경험한 최선의 길임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바른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제 후배 연구원들에게 35년 전 지도교수처럼 힘줘 반복해서 질문한다. “틀려도 좋으니 당신만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joonkim@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