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完全社會]본성이 우리를 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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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단편집 '두번째 유모'에 수록된 '사춘기여 안녕'을 좀 훑어보자.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정상이 아닌 이유는 '시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기를 정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자격지심에 가득 차 있는 나는 별것 아닌 일로 폭력적인 소동을 벌인다. 그리고 폭력적 소동을 벌이는 것 자체가 내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요즘 세상의 아이들이 모두 받는 시술은 척추에 나노봇을 주입해 진행된다. 나노봇은 뇌로 직접 들어가 모종의 작용을 한다.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시술에는 사람의 사고와 의지를 명료하고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개인의 머릿속에 휘도는 생각은 빨리 정리되고 이해가 손쉬워진다. 욕망으로 인한 내적 갈등은 남아 있지만, 욕망도 편리하게 환상으로 밀어 넣은 뒤 현재의 과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술은 인간을 꿈만 꾸던 이성적인 존재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

아이들이 받는 시술을 나만 왜 받지 못하고 있느냐면, 나의 아버지가 시술을 받지 않은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시술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세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다. 폭력적인 소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나는 내가 시술을 받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어떻게든 시술을 받고자 한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게임 산업의 이슈를 떠올렸다. 온라인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 이슈에 불이 붙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한국 모바일게임과 MMORPG들의 주요 수익 모델은 아이템 뽑기다. 플레이어들이 금액을 투입하면 일정 확률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본래는 게임계에서 자율 규제를 통해 확률을 공개하기로 했지만, 그게 생각만큼 효과를 거둔 것 같지가 않다. 어떤 게임은 공개되지 않은 확률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가 플레이어들이 들고 일어서기도 했고.

게임 자체는 무료로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되, 플레이어가 강해지거나 멋있게 보이는 수단을 뽑기로 제공하기. 이 혁신적인 방법론은 십수 년 전 패키지를 팔던 때보다 게임 산업의 규모 자체를 수십 배는 뻥튀기 시키는 데 성공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게임사들의 시가총액을 보면 경영진들은 확실히 행복할 것 같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때만큼 행복하지 않은 듯하다. 게임 캐릭터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 부어서 가정이 무너지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캐릭터에 쓴 돈 때문에 현실의 생활비가 모자라게 되는 경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게임에 돈을 쓰는 게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취미는 팍팍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중요한 삶의 구성 요소다. 타인과 자신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즐길 수 있다면야, 취미에 돈을 쓰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상한 일이겠지. 문제는 뽑기는 병적으로 발달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를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의지보다는 뽑기라는 시스템 자체에 내재한 필연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벌허스 프레드릭 스키너의 강화이론에서, 사람의 행동은 보상이나 처벌 중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빈도가 달라진다. 강화를 받으면 행동이 많이 반복되고, 처벌을 받으면 행동이 억제된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보상을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강화 양식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비둘기에게 버튼을 누를 때마다 먹잇감을 준다면 비둘기는 버튼을 누르는 것을 빠르게 학습하지만, 버튼을 눌러도 먹잇감이 떨어지지 않게 되면 금방 버튼을 누르지 않게 된다. 하지만 비둘기가 버튼을 무작위 횟수만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떨어진다면, 비둘기는 먹잇감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되더라도 미친 듯이 버튼을 누른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것이 진화동안 우리 뇌에 새겨진 생존을 위한 본성이라고 말한다. 자연에서는 어떤 행위가 즉각적인 보상을 꾸준히 제공하기보다는 간헐적이고 무작위적으로 제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니까.

뉴런 시냅스들이 간헐적으로 강화를 제공할 때 도파민을 더 뿜어내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도박의 중독성이 뉴런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마약만큼이나 강렬한 이유다. 강화를 간헐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뽑기는 도박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자율규제를 통한 확률 공개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도박보다 더 심각하고.

한때 진화적 적응을 통해 우리 DNA를 보존하는 데 성공한 본성이,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뒤따르지 못하고 되려 우리에게 칼을 겨누게 된 것이다.

플레이어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게임 회사들이 뽑기에 대한 자율 규제를 먼저 제창했을 때 처음부터 그걸 무시할 생각이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뽑기에서 돌아오는 무시무시한 수익이라는 욕망을 자율적으로 견뎌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 같다.

듀나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우리도 척추에 나노봇 주사를 한 대 맞기만 하면 본성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 곳곳에 상한 우유처럼 엉겨 붙어 있는 이성과 욕망과 감정의 복합체를 스케일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후련할까. 우리 인간이 사춘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세상은 아름다울까.

하지만 당분간은 그러기 힘들어 보인다. 우리 모두는 본성의 지배에서 감히 벗어날 수 없으니, 나는 국가가 개입하여 게임 산업의 뽑기에 적절한 규제를 가하기만을 바란다.

심너울 소설가

심너울 소설가
<심너울 소설가>

서강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의 2018 '같이, 가치' 프로젝트에서 소설 '정적'으로 데뷔했고,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로 2019년 한국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