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특허소송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시급

[기고]특허소송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시급

반도체 불량 테스트 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 A사는 자사 특허를 베낀 유사품이 거래처에 납품되면서 매출에 큰 타격을 받았다. A사는 바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지만 경쟁사가 특허침해의 증거가 되는 유사품 제출을 거부하며 특허소송이 표류, 애를 태우고 있다. 태양광패널용 고출력 와이어를 세계 최초로 양산한 대기업 B사는 중국 업체가 모방품을 저가로 생산하자 특허소송을 통해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해당 업체로부터 모방 여부와 판매 수량을 입증할 증거를 확보할 길이 없어 결국 소송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 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특허소송에서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제도는 특허침해소송에서 침해 여부와 피해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가 침해자 측에 있지만 정작 권리자는 이를 입수하기 어려운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현재 국회에 묶여 있는 법안은 특허소송에서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침해 현장에 들어가 증거를 수집하는 전문가조사와 고의적인 증거 훼손에 대한 제재 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특허 선진국에서는 권리자가 소송 과정에서 침해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절차가 잘 갖춰져 있다. 미국은 1930년대부터 특허소송이 제기되면 당사자 상호 간 광범위한 증거 자료를 교환하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증거를 인멸한 것이 드러나면 상대방 주장을 진실로 인정하는 등 엄격한 책임을 지게 한다. 양 당사자가 핵심 증거 자료를 서로 공개하다 보니 시시비비가 드러나 정식 재판의 93%가 본안 소송 이전에 합의로 해결되는 실정이다. 독일은 2008년부터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특허를 침해한 상대방 제조시설에 출입해서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도 2019년에 특허법을 개정, 독일과 유사한 전문가조사 제도를 도입했다.

일부 업계는 한국형 증거수집제도가 도입되면 외국 기업이 이를 악용해 우리 기업을 상대로 무차별 특허소송을 제기하거나 전문가 조사 과정에서 기업의 영업비밀이 상대방에게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등 이유로 제도 도입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 관련 법안은 전문가조사 여부를 법이 정한 요건을 엄격히 고려해서 법원이 판단하기 때문에 소송 남발을 방지할 수 있다. 또 법원이 정한 전문가가 사실조사에 취득한 영업비밀을 유출했을 시에는 형사처벌과 함께 자격도 박탈하는 등 강력한 제재 조치도 두고 있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가 없어도 미국에서 특허소송이 벌어지면 국내 기업도 미국의 증거수집 절차에 응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벌어진 국내 전기차 배터리업체 간 영업비밀 분쟁에서 승패를 가름한 것은 증거 수집 과정에서 고의적인 증거 훼손 여부였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는 이미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실시하고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국내 증거 수집 절차가 미비해 국내기업 간 소송이 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등 수천억원의 막대한 소송비용을 쓰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은 막아야 한다.

특허청은 지난 수년간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특허손해배상액 현실화 등 특허권 보호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는 이러한 제도 개선이 실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더 이상 도입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앞으로 일부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한편 우리 실정에 맞는 제도 마련을 위해 업계와 긴밀히 소통하는 등 고민해 나가겠다.

앞에서 언급한 A사 홈페이지에는 기술 베끼기 근절을 위해 특허법 개정 촉구 호소문이 걸려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낯부끄러운 광경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노스는 “제도는 인간의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게임의 룰”이라고 했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는 우리나라의 특허 보호제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는 게임의 룰이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은 '시기상조'가 아니라 오히려 '만시지탄'인지도 모른다.

김용선 특허청 차장 iprkhan@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