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20>박 대통령, 과기연구소 장소 결정

1966년 10월 6일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 부지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66년 10월 6일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 부지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요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출범하고 한·미 간 공동 지원 사업계획 협정서까지 체결한 지 2개월여가 지났지만 연구소 부지 선정은 오리무중이었다. 1순위 후보지는 해당 부처가 펄쩍 뛰며 반대했다. 최형섭 초대 소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부지 선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대통령이 서울 홍릉에 있는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을 알아보라고 해서 농림부 장관에게 말을 꺼내니 한 평도 못 주겠다고 거절했다.”

최 소장은 기다리다 못해 대전, 천안, 부평(인천시), 서울 등 전국 17개 후보 지역을 검토하고 경기 동구릉(현 경기 구리시) 일대 15만평(49만5000㎡)을 후보지로 내정했다. 연구소는 1966년 4월 8일 이사회를 열고 부지 추진안을 승인했다. 연구소는 이어 소관 부처인 문교부에 공문을 보내 협조를 구했다. 그해 4월 말.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을 수행해 미국과 유럽의 선진 연구개발 현황을 돌아보고 귀국한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은 연구소 부지 문제를 그때까지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홍릉 임업시험장과 동구릉 두 곳을 유력 후보지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두 곳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다. 우선 동구릉은 서울에서 거리가 멀고, 조선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7명의 조선 왕과 왕비를 모신 곳이다. 서울에서 동쪽에 있고 능이 9개여서 동구릉이다. 재산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소유다. 이에 따라 재산을 이양받기가 어려웠다. 반면에 홍릉 임업시험장은 연구소 장소로 최적지였다. 1965년 9월에 내한한 미국 바텔조사단은 홍릉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장소로 적격하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난관은 소관 부처인 농림부(현 농림수산식품부)의 완강한 반대였다. 임업시험장은 1922년에 출범했으며, 당시는 농촌진흥청 산하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로 제공하는 일에 농림부와 농촌진흥청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부처 예산권을 쥐고 있는 경제기획원 장관도 별다른 해결 방안을 찾지 못했다. 청와대도 연구소 부지 선정에 나섰다. 설립자가 박정희 대통령이고 평소 과학기술을 보는 대통령의 높은 관심도를 잘 아는 청와대 경제비서관실은 서울 시내 후보지를 샅샅이 뒤졌다. 당시 청와대 경제 비서관으로 있던 한준석 전 해운항만청장의 회고록 증언. “해외 과학자들을 유치하려면 연구소 위치가 좋아야 하고 숙소 같은 문제도 꼭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조건에 부합한 곳을 구하려고 서울 시내를 다 다니며 확인했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괜찮다 싶은 곳이 홍릉 임업시험장이었다.(한국경제를 살린 박정희)”

한준석 비서관은 농촌진흥청에 부지 양도 가능성을 타진했다. 농촌진흥청은 청와대 뜻인데도 양도할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홍릉은 서울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고, 그곳의 나무 한 그루는 학술 연구 대상이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수종이 이곳에 심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면적이 38만평(125만4000㎡)에 달해 전 면적을 임업시험장이 다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가 농촌진흥청에 재검토를 요청했지만 역시 꿈적도 하지 않았다.

연구소를 놓고 부처 간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청와대는 이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청와대가 총대를 메고 전면에 나섰다. 그해 5월 2일 오전. 한준석 비서관이 전상근 국장에게 전화했다. “전 국장, 대통령 각하께서 연구소 문제에 대해 보고 받고 싶어 합니다. 곧 들어와서 보고하시오.” 전상근 국장은 연구소 부지 후보의 지적도를 들고 곧장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별관 2층 상황실에서 전상근 국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상근 국장이 회고록에서 밝힌 그날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국장, 연구소 부지 문제를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면서?” “네, 각하.” “어느 곳을 원하는데 결정을 못 짓고 있나. 무슨 문제가 있는가?” “원하는 땅은 홍릉 임업시험장의 일부입니다. 농림부 반대가 워낙 심해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이 전화기를 들었다. “농림부 장관과 전화를 연결해 줘요.” 박동묘 농림부 장관과의 전화가 연결됐다. “박 장관, 지금 곧 청와대로 왔으면 좋겠소. 올 때 농촌진흥청장도 함께 오시오.” 전화를 끊은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를 불러 지시했다. “서울시장과 최형섭 연구소장에게 연락해서 곧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하게.” 이날 청와대에 급히 불려온 사람은 김현옥 서울시장, 박동묘 농림부장관, 이태현 농촌진흥청장 등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과 함께 후보 부지가 있는 홍릉으로 출발했다. 당시 홍릉 임업시험장 부근은 무허가 판잣집이 밀집해 있었고, 도로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행과 임업시험장 일대를 한 바퀴 돈 뒤 홍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일행은 모두 차에서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형섭 소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최 소장, 연구소 부지는 얼마나 필요하오?” “한 10만평(약 33만㎡)이면 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심한 듯 박동묘 농림부장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박 장관, 이제 양보하시오.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연구소는 더 중요하오.” 박동묘 농림부장관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연구소 설립의 가장 큰 난제이던 부지 문제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연구소 부지를 잡은 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홍릉 시찰이 끝난 뒤 한준석 비서관과 전상근 국장은 함께 청와대로 갔다. 홍릉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관계 부처에 알리기 위해 이후락 비서실장 명의의 공문을 기안했다. 연구소는 그해 6월 7일 이사회를 열고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와 함께 기술용역 계약안을 승인했다.

연구소는 6월 10일 바텔기념연구소와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세부 지원 방안에 관해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연구소 설립과 건설계획 지원 △연구원 충원과 훈련 지원 △기술정보 제공 △연구와 조사사업에 필요한 전문가 지원 등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는 이후 인사·회계·정보·건설 관계 전문가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경제기획원은 연구소가 선진국의 어떤 연구소 기능 못지않은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텔기념연구소에 연구소 설계에 조예가 있는 업체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텔 측이 추천한 업체는 연구소 건설 경험이 많은 미국 ACMA였다. 연구소는 ACMA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연구소 기본개념 설계를 맡겼다. 다만 연구소 설계용역은 한국 업체가 담당하게 했다. 이에 따라 연구소는 그해 7월 △연구실 실적이 많고 △과학 관계 건물 실적이 많은 설계업체 △미학과 창의성이 뛰어난 업체 등 9개 항목의 설계자 선정 기준을 마련했다. 1차로 10개 설계업체를 선정해서 각 업체 직원과 설계 실적을 조사한 뒤 26개 항목의 설문지를 받아 평가했다. 최종 2개 업체를 선정해서 연구동을 비롯한 실험실과 공장 설계는 무애건축연구소, 본관과 주거시설 설계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각각 담당했다. 이광노 무애건축연구소 대표와 김수근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대표는 한국 현대건축을 선도한 주역이다. 콘크리트 노출 공법으로 지은 본관 건물은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두 업체는 연구 활동을 하면서 공간이 더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공간을 늘릴 수 있도록 하는 등 미래를 고려해 설계했다. 특히 홍릉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연구소 건물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 연구소는 설계 작업과 함께 시설과 기기를 선정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이 일은 연구소 건설사업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연구소가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기기 선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연구소 측은 이 일도 전적으로 바텔기념연구소에 맡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한국 측 누구도 시설과 기기를 선정한 경험과 경륜을 쌓은 사람이 없었다. 바텔기념연구소는 자신들이 사용하던 종류의 시설과 기기를 그대로 선정해서 한국 측에 넘겼다. 그들도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해 10월 6일.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이날 오전 10시 임업시험장 부지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식이 열렸다. 국내 처음의 대규모 연구소 기공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치사를 통해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과 근대화도 이룰 수 없다”면서 “과학기술 진흥은 우리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소가 우리 과학기술자에게 창조적인 연구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과학의 전당으로 발전하고 과학기술 5개년 계획 실천의 선도 역할을 담당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형섭 소장은 식사에서 “국내외 연구기관들과의 유대를 강화해서 우리 산업이 요구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나아가 독자 과학기술 개발도 연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기공식에는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해당 부처 장관과 국회의원·과학자,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도널드 호닉 박사와 버스틴 유솜 처장, 토마스 D. 버트럼 바텔기념연구소 이사장 등 한·미 양국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연구소 기공식은 과학기술 입국으로 가는 첫 디딤돌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