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K-바이오, 새로운 성장 나이테를 그리며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이사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이사

나이테는 계절별로 나무의 성장 속도에 차이가 나면서 마치 동심원 형태의 무늬들이 형성된 것이다. 계절이 뚜렷한 온대지역의 나무는 나이테가 뚜렷한 반면에 일년 내내 온도가 비슷한 열대지역의 나무는 나이테가 뚜렷하지 않다. 대한민국 '바이오'라는 나무에는 나이테가 몇 개나 있을까.

신약 기준으로 본면 첫 나이테는 1987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1987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물질특허'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GATT에 가입하면서 물질특허 제도를 새롭게 도입했다. 물질특허 도입은 '신물질'을 만들어 본 적 없는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는 생존의 위기로 받아들여졌고, 그 위기 의식에서 신물질 발굴 연구를 시작했다. 혁신 신약을 개발할 체력이나 실력은 도저히 되지 않았고, 이미 출시된 성공 약물들을 조금 바꾸어서 개선하는 정도의 연구였다. 지금 보면 그러면 안 되는 연구 방법이었지만 당시 국내 신약 연구자들에게는 이마저도 죽을 힘을 다해 도전하며 그야말로 '넘사벽'을 넘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몸부림 결과 1997년부터 몇 년 동안 SK바이오팜(당시 유공), 엘지화학, 유한양행이 죽을 힘을 다해 찾은 신물질들을 임상 1상 정도 단계에서 다국적 제약회사에 기술 수출하는 성과가 나오게 됐다. 그 당시 기술 이전된 약물들은 모두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기억속에 잊혀진 물질이 되었지만 당시 프로젝트에 기여한 참가자들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계 및 투자업계 도처에서 활약하고 있다. '물질들'은 쓸쓸하게 잊혀졌으나 '인재들'은 실패의 거름으로 길러지고 성장했다.

두 번째 나이테는 전 세계적으로 벤처 붐이 일면서 첫 바이오벤처 창업 열기가 뜨겁던 2000년과 그 후 기나긴 빙하기와 같던 2015년 전까지 형성되었을 것 같다.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즉 한미약품의 연속 빅딜들이 있기 전까지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는 긴 겨울을 보내야 했다. 2000년도 아주 짧은 창업 및 투자의 열기는 전 세계적인 IT 거품 붕괴, 그 이듬해 9·11 사태에 따른 세계 경제 충격, 2008년 금융위기 등으로 아주 긴 '빙하기'에 자리를 내어 줬다.

하지만 그 긴 빙하기에 절대 아무 일 없이 얼음만 얼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바이오벤처들의 부단한 노력과 인력 축적, 정부 차원의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 발족, 자본시장에서의 '기술성 평가' 트랙과 같은 상장제도 정비, 우회 등록 등을 통한 자본시장 진입 시도, 국내 기초과학의 꾸준한 성장, 자본 여력이 생긴 국내 전통 제약사들의 자체 신약 개발 노력 등으로 어찌 보면 오히려 '뜨거운 빙하기'를 보냈다.

2015년 한미약품의 놀라운 기술 이전 성과로 마치 겨우내 땅속에서 생명을 보존한 채로 싹이 틀 봄날을 기다리던 씨앗들처럼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양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모험자본 투자 증가, 기술성 평가에 의한 상장 사례 증가,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창업 증가, 해외 과학자의 귀환 및 창업 증가, 바이오텍의 대규모 기술이전 사례로 업계는 급격한 팽창을 경험했다. 초기 바이오텍들의 쉬운 자본 접근성과 이에 따른 임상 개발 수의 증가, 전임상 임상 개발 인력들의 업계 유입 등은 '인력난'이라는 새로운 현상까지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제약바이오 업계는 어느덧 이러한 팽창기 이후 필연적으로 따르는 축소기를 겪고 있다. 사실 업계에 오래 몸담고 있는 전문가들은 '언제 그리고 어느 정도 강도'의 이슈였을 뿐 축소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팽창과 축소 사이클은 어느 산업, 어느 분야나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1987년부터 시작해 2022년까지 몇 번의 나이테들을 만들며 놀랍도록 성장한 K-바이오의 다음 성장기를 준비할 때다. 팽창기 중 유입된 자금과 인력,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대학과 연구소의 기초연구 역량은 다음 성장기 나이테를 만들 재료들이다.

팽창기 때에 비해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많은 생각을 요구하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욱더 알찬 기업들이 차근차근 성장할 것이다. 지난 35년 동안 K-바이오는 어려움의 시기에 더욱 단단해지고 풍부해져서 지금까지 왔다. 어렵고 힘든 때일 수록 더 멀리 보고 더 높이 볼 때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이사 james.lee@bridgebior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