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기술사업화와 금융 지원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중국의 대표 자동차 제조사인 비야디(BYD)는 올해 초 5분 충전으로 최대 500km까지 주행 가능한 전기자동차 플랫폼을 발표했다. 4월에는 유럽에서 테슬라를 제치고 월간 판매량 1위도 달성했다. BYD가 유럽 시장에서 성공한 주요 요인으로는 순수 전기차 외에 다양한 모델 출시와 공격적인 가격 전략 등이 꼽힌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유럽연합(EU)으로부터 최대 45%의 고율 관세를 부과받고도 가격 경쟁력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BYD 외에, 삼성과 LG를 압도하는 성능의 로봇 청소기로 유명한 로보락, 전기차 배터리 분야 점유율 세계 1위 CATL, 저비용 고성능으로 주목받은 인공지능(AI) 딥시크 등 각 산업 분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그동안 자국 제조업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확대를 과감히 추진해 온 정부의 노력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성장으로 제조업과 수출로 지탱해 온 우리 경제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철강과 석유화학 등 기존 주력 산업들이 중국발 저가 경쟁에 내몰린 데 이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로봇, 전기차, AI 등 우리의 전략적 육성 대상인 첨단산업마저도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잘하는 분야가 중국과 겹치고 서로 부딪히는 점은 매우 위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미국마저도 견제할 정도로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중국 산업 성장의 핵심은 바로 '기술사업화의 속도가 빠르다'라는 점이다. 개발된 기술을 실제 사업에 적용하여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다는 뜻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일단 새로운 제품이나 사업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기면 바로 구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지역 대학, 공공기관, 스타트업, 연구기관들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덕분이다. 빠르게 시작하고 빠르게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술사업화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다. 대학 캠퍼스 전체, 혹은 도시 한 곳이 거대한 실험장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제조업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기존 규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업 모델을 실증하고 상용화에 필요한 데이터를 쌓으면서 성공적으로 스케일업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요소다. 미국이 인재 다양성과 오랜 기간의 기초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세계 산업기술 시장을 지배하는 동안,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토대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후발 주자로서의 차이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세계 29위)로나 국토 면적(세계 108위)으로도 미중 양국의 기술 정책을 따르는 것은 부적절하고 역부족이다. 그래도 민관이 합해 국내총생산(GDP)의 4.9%(2023년 기준 120조원)를 연구개발(R&D)에 투입할 정도로 기술혁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사업화 속도를 높인다면 앞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술사업화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 경제의 혈액 순환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인 기업이 활발하게 혁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술사업화에 필요한 자원을 적기에 제공함으로써 그 속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업화에 필요한 투자 유치의 물꼬를 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정부 자금을 종잣돈으로 하는 정책 펀드를 조성해 기술을 사업화하려는 제조기업에 직접 투자금을 수혈해 주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운용을 시작한 산업기술정책펀드는 현재 34개 약 2조5000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투자→회수→신규 투자의 선순환 고리가 잘 정착돼 있다.

조성된 정책펀드 중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은 첨단산업 투자의 중요한 주체가 되었다. KIAT는 현재까지 총 6개 CVC 펀드에 출자자로 참여해 결성을 완료했으며, 산업 관련 기업을 위한 전용 융자 지원 사업을 신설했다. 기업당 최대 50억원을 지원하는 이 사업에는 매년 100~150개 기업이 신청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2027년까지 약 5800억원의 융자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그러나 정부 자금은 규모와 파급력 면에서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직접 금융 방식만으로는 충분한 재원 조달이 어렵기 때문에 마중물 역할을 하는 정부 자금 외에 더 많은 금융기관이 기업을 지원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KIAT는 정부 자금을 지원할 때 처음부터 민간 벤처캐피털의 외부 투자 유치를 전제로 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투자사를 초청해 규제샌드박스로 특례를 받은 기업이 투자 유치를 받을 수 있도록 기업 설명회도 자주 개최한다.

최근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 벨퍼센터는 반도체, 바이오, AI, 우주, 양자 등 5개 주요 첨단산업에 대해 세계 25개국의 기술 경쟁력을 평가한 '핵심 및 신흥 기술 지수(CET Index)'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종합 5위(20점)를 차지했다. 반도체가 5위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은 가운데, AI는 9위, 바이오는 10위, 양자는 12위, 우주 분야는 13위였다.

세계 주요 국가들과의 첨단산업 경쟁력 평가에서 5위 안에 든 성적은 나쁘지 않게 보이지만, 1위인 미국(84.3점)이나 2위 중국(65.6점), 3위 유럽(41점)의 종합 점수와 비교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벨퍼센터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기술 역량이 지금은 높지만, 향후 주요국과 격차가 벌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나 중국과는 결이 다른, 우리 실정에 맞는 산업진흥정책을 수립해야 하므로 앞으로 정부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새 정부는 AI를 비롯한 차세대 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와 첨단전략산업 분야의 혁신 생태계 조성 등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KIAT는 인력 양성, 국제협력, 기술개발 등 다양한 형태로 국가첨단전략산업을 총괄 지원하는 플랫폼 기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술 인재 양성, 산학연 협력 네크워크 구축, 글로벌 공급망을 고려한 선도 기술 확보에 더욱 집중하고 노력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기업에 필요한 정책 금융을 확대하고 '첨단산업에 투자해도 좋다'는 명확한 신호를 시장에 심어줘야 한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뒤처지는 냉혹한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건강한 K산업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KIAT는 온 힘을 다할 것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 기술금융 지원 현황
한국산업기술진흥원 기술금융 지원 현황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

〈필자〉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기관장으로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간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2022년 9월부터 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