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산업 기술 발달로 인해 창업의 창공은 무궁무진해졌다. 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 창공 높이, 멀리 날아갈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의 풍파를 그대로 맞아 창공에서 곤두박칠 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도화된 사회 속에서 창업으로 성공하는 건 쉽지 않다.
기술의 발달은 직업의 다양성을 낳았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직업의 다양성만큼 근로자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우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판례의 기준은 확고하다. 대체로 증거가 없고 뭘 계속 시키면 종속관계가 있어서 근로자로 본다. 근로자인지 아닌지 아리송할 때 “내가 근로자요”라고 인정받기 더 쉬운 구조라는 뜻이다. 이는 자본주의 속에서 '체계를 구축한 책임'을 더욱 엄격하게 묻는 것이라고 평가된다. 함부로 이상한 체계를 만들어 귀한 사람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뺏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사·노동 사건을 접하다 보면 톨스토이의 고전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의 고전이 떠오를 때가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 3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인간의 몸이 되어 인간 세계로 추방된 천사가 찾는 여정이다.
천사가 깨달은 답은 △추운 겨울 알몸인 자신을 도와준 가난한 사내로부터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음을 △오늘 저녁 죽을 것이 보이는 부자가 수제 구두를 주문하는 모습으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음을 △천사가 추방되기 전 쌍둥이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었었는데 그 쌍둥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으로부터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OO전자'로 대표되는 제조업이 첨단 산업인 때가 있었다. 이제 노동의 영역은 제조업을 넘어서, 직업의 개수만큼 폭발적으로 다양해졌다. 동시에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영역 또한 증가해 과거의 노동은 이제는 더 이상 '수요'가 없는 분야도 많다. 어쨌든 노동은 임금과 사람의 시간과 노력을 교환하는 것이므로 그만한 임금을 줄 만한 '수요'가 발생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의 태생적 한계다.
당연히 창업하면 스스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수요가 있으면' 시장에서 '매출'로 되돌려 받는다. 이런 사람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으로 불린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돈을 버는 노동자와 사장 사이에는 돈을 못 버는 두 부류가 있다. 실컷 일을 했지만 사장이 돈을 못 벌어 임금을 받지 못한 체불임금 노동자와 실컷 일을 했는데 시장으로부터 인정을 못 받아 적자가 나는 상황이다. 전자는 천만원까지는 일단 근로복지공단에서 보호한다. 후자는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라 알아서 잘해야 한다. 둘의 본질적 차이는 '스스로가 구축한 체계' 유무다. 결국 사장으로 살아남으려면 시장을 잘 보고 판을 잘 깔아야 한다.
노동 사건이 터지면 다들 법원을 찾는다. 법원은 최종 분쟁 해결 책임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든 잘라버리려는 판단을 받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정보기술(IT) 시대에 일의 형태가 다양해질수록 더욱 그렇다. '충분한 논의를 하면 소송으로 끝장을 내는 것 보다 서로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근로자-사용자'라는 대립 구도가 잔상에 남다 보면 법으로 거칠게 해결하고 싶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동 사건을 직면했을 때 한 번쯤은 대척점에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노동사건 터지기 전에는 체계를 구축하려는 고민과 시도를 한 사용자가 있었기 때문에, 근로자로서 생존할 수 있었고, 그렇게까지 일을 해준 근로자가 있었기 때문에 사업이 굴러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용자에게는 근로자를 부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처럼 대하는 선한 마음이, 근로자에게는 사장이 일을 시키는 사람만이 아니라 한배를 탄 사람으로 대하는 선한 마음이, 지금보다는 전반적으로 더 많아지면 좋겠다. 물론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은 사용자와 노동조합의 모두의 책임이다. 사람은 여전히 사랑으로 산다.

허신걸 법무법인 YK 변호사 hsgyk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