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팔은 간편결제 시장을 개척한 글로벌 기업이다. 미국 정부는 '새로운 금융'을 실험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규제 문턱을 낮췄다. 페이팔은 보안성과 편의성으로 금융 생활의 판도를 바꿨다. 현재 미국 간편결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규제 예외를 허용한 유연한 환경이 페이팔을 탄생시켰다. 한국도 금융 규제 샌드박스(금융 혁신서비스)로 혁신을 유도하고 있으나, 최근 실험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 실제 샌드박스에 지정된 서비스 중 중소 핀테크 비중은 2019년 약 62%에서 2024년 약 5%로 급감했다. 상반기에도 전체 63건 중 단 5건(8%)만이 중소기업에 돌아갔다.
원인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심사 기준에 있다. 자본력, 리스크 관리, 소비자 보호 체계까지 갖춘 기업만 문턱을 넘을 수 있다. '실패 없는 실험'만이 허용된다. 대형 로펌·회계법인의 자문 없이는 신청 자체가 어렵다는 게 업계의 푸념이다. 대형 금융사나 빅테크 기업은 내부 전문 조직으로 샌드박스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결과 핀테크 시장은 네이버페이·카카오페이·토스 등 빅테크 중심으로 고착됐다. 오히려 대형 금융사와 빅테크가 규제 유예를 발판 삼아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는 상황이다. '포스트 네카토'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생태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무너뜨린다. 중소 핀테크가 촉발하는 실험적 기술과 서비스는 금융시장에 자극을 주고, 대형사로 확산되는 '파급효과'도 만든다. 이 흐름이 끊기면 산업 전반의 혁신 동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샌드박스 제도는 설계 철학부터 재정비해야 한다. 동일한 기준에서 심사를 받아야 공정한 것이 아니다. 기업 규모와 역량에 맞는 유연한 평가체계가 필요하다. 중소기업, 스타트업을 위한 별도 트랙, 기술 중심의 평가 체계, 공공 자문 지원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

박두호 기자 walnut_park@etnews.com